불편해도 애써 기억해야 하는 것들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늘 손이 먼저 움직이던 비밀번호가 그날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 번, 두 번. 숫자는 분명 익숙한데 순서가 흐릿했다. 문은 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젠 나이가 들었나 하고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한때 많은 것을 외웠다. 가족의 전화번호와 친구네 집 주소, 약속 장소로 가는 길까지 기억은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휴대전화가 생겨나고도 단축번호라는 최소한의 기억 장치를 남겨 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의 검색창은 기억을 대신해 주고, 지도는 방향 감각을 대체하고, 알림은 모든 시간을 관리해 준다. 편리함은 친절하다. 그러나 친절함이 지나치면 쓰지 않는 근육이 약해지듯, 쓰지 않는 기억도 서서히 힘을 잃는다.
요즘 자주 주변에서 하는 말이 있다. '디지털 치매'라는 말. 그래서 단순한 유행어라기보다 기억의 문제이고 삶의 질에 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보통 더 많은 것을 기계에 맡기고, 더 적은 것을 감당한다. 맡길수록 가벼워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무게는 다른 곳에 쌓인다. 어느 날 문 앞에서 멈춰 섰을 때처럼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순간으로 말이다.
편리함의 대가가 드러나는 것은 개인의 기억만이 아니다. 최근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편리함에 기대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문 앞까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물건들, 몇 번의 클릭으로 완성되는 소비. 그 편안한 일상 뒤에서 나의 정보는 어디론가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문제는 사고 그 자체보다, 사고 이후의 문제다. 허술한 대응은 편리함이 쌓아 올린 신뢰가 얼마나 얇은지 드러낸다.
그럼에도 탈쿠팡을 고민하는 이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편리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생활의 리듬을 바꾸는 할 테고 익숙한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가격을 비교하고 동네 가게를 들르고 또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 불편함은 번거롭다. 그러나 그 번거로움 속에서 다시 시간을 기억하고 선택의 감각이 차분해진다. 어떻게 물건을 사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편리함은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비용을 요구한다. 돈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으며, 관계나 신뢰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비용이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씩 쌓이다가 한꺼번에 터질 때, 그제야 깨닫는다. 편리함은 선물이 아니라 계약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계약서에는 작은 글씨로 된 조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 조금은 일부러 불편해지려 한다. 메모를 하고 기억하려 애쓰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보며, 익숙한 길에서도 기억해 두려고 애를 쓴다. 불편함은 느리지만 또 느림은 생각을 불러온다. 생각은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모든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 무엇을 붙잡을지 나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편리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묻지 않는다면, 가장 빠른 길로 가장 먼 곳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현관문 앞에서 멈춰 섰던 그 짧은 순간은, 나에게 속도를 줄이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잊어버린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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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하더라도 다른 길을 찾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인간다움으로의 복귀일지도 모른다. 편리함의 그림자에서 잠시 벗어나, 손으로 만지고 발로 걸으며 다시 삶을 기억하는 일. 그 느린 선택이야말로, 혹독한 대가를 막아 줄 작은 보호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