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아직도 그 소리를 먼저 기억한다
눈이 오면 나는 아직도 그 소리를 먼저 기억한다. 눈 위를 스치는 싸리비의 사각거리는 소리, 쓱싹쓱싹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지던 그 소리. 유년의 겨울은 언제나 그 소리로 시작되었다. 밤새 하얀 눈이 오면 새벽을 먼저 깨운 이는 늘 할아버지였다. 마당으로 나서는 기침소리와 문을 여는 소리는 할아버지 특유의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던 쓱싹쓱싹 싸리비질 소리. 그 소리는 하루를 여는 소리이고 세상을 여는 소리였다.
나는 얼른 일어나 작은 빗자루를 들고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할아버지가 넓은 마당에 길을 내면, 나는 그 옆에 나만의 좁은 길을 냈다. 어른의 길은 곧고 넓었고, 아이의 길은 비뚤비뚤했지만 그날의 눈은 모든 흔적을 나란히 품어주었다. 은빛으로 내려앉은 마당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책임감으로, 나는 설렘으로 눈을 쓸었다. 그 순간 알지 못했지만 인생은 그렇게 각자의 길을 내며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이미 몸으로 가르치고 계셨다.
나의 유년시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다. 돌을 가지런히 쌓아둔 담장 위에도, 잎을 떨군 감나무 가지에도 소복이 눈이 쌓였다. 먼 산과 들은 온통 은빛으로 잠겼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포근했다. 밤새 문풍지가 울다 잠잠해지면 아침잠이 없던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일어나 군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셨다. 그 따뜻함이 방 안에 스며들 무렵 마당에서는 다시 싸리비 소리가 들렸다. 눈을 치우는 일은 힘든 노동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손길은 늘 단정했고 서두름이 없으셨다.
마당을 지나 골목 어귀까지, 할아버지는 길을 내어놓아야 직성이 풀리셨다. 동네 사람들은 친정이 종갓집이라서 종가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의 스스로 지켜낸 원칙이고 책임이었다. 눈을 치우는 것은 길을 깨끗이 하는 일이고 누군가가 넘어지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일이었고, 보이지 않는 이웃을 위해 수고를 감내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몸소 그 많은 시간을 쓰며 눈 오는 날마다 하얀 길을 내어놓으셨다.
저녁놀이 마을을 감싸 안을 즈음이면, 사랑채에서는 쇠죽을 쑤는 냄새가 퍼졌다. 왕겨를 한 줌씩 뿌리고는 장작을 듬뿍 넣으시던 할아버지의 손길은 투박했지만 정성스러웠다. 무쇠솥 언저리에 나란히 놓인 김 서린 양말에서는 말없는 사랑이 피어올랐다. 그 양말을 보며 나는 알았다. 사랑은 식지 않게 데워두는 마음이라는 것을. 긴 겨울밤 쇠죽을 끓이고 남은 잔불 속에 묻어두었던 고구마의 달콤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고전을 읽어주시던 할아버지의 낮고 느린 목소리는 세상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들려주던 자장가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마당을 떠났고, 할아버지는 어느새 기억 속에 아련하게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그 싸리비 소리는 아득하게 다시 살아난다.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할아버지가 평생 내어주신 길은 삶의 거친 날들 속에서도 세상은 조금 덜 차갑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ㅈ
요즘 겨울이지만 그리 춥지 않다. 말간 겨울 햇살이 거실 가득 들어온다. 나는 의자에 앉아 두 팔을 벌려 그 빛을 맞는다. 계절이 저물고 한 해가 가는 자리에서, 나는 지금 누구에게 길을 내어주며 살고 있는가. 감사는 오늘의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이제는 안다. 유년의 겨울은 내게 맑고 포근한 세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눈길을 내어주던 한 사람이 계셨다. 그리고 오늘도 그 길 위를 조심스레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