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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Jun 15. 2016

오래된 친구들

D + 23

(사진은 그리운 중학교)


하루 생각

친구 만나기 쉽지 않네...


내가 자라던 때의 서울은 허리 살이 늘어나는 비만 아동처럼 점점 덩치를 키워나가던 시기였다. 논밭뿐이었던 교외지역마다 아파트가 생겨났고 우리 가족 역시 새로 생겨난 서울의 서쪽 끝자락으로 이사를 왔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다가 어린애들을 둔 젊은 부부들이 많이 입주한 탓에 텃세라는 게 없었고, 모든 아이들이 점처럼 외따로이 지내고 있었다.


이삿짐을 풀고 열흘이나 지났을까, 옆집 사는 녀석이 난간에서 장난치고 있길래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내려와. 떨어지면 머리 깨져” 최초의 친구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그 날 우리는 친구가 되어 난간 위에서 같이 놀았다. 운 좋게도 그 녀석은 나와 나이가 같은 사내놈이었고, 유치원마저 같은 곳을 다니게 되었다. 모두가 이방인으로 출발하는 신도시에서 혼자가 아닌 둘은 두려울 게 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저마다의 점들이 알아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보다 둘이 넷이, 넷이 여덟이 되는 게 훨씬 쉽고 빨랐고,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에 우리는 우습지만 분명했던 권력관계의 꼭대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 덕분에 내성적인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 날 내가 난간 위의 친구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내 유년 시절은 크게 달라졌을 거다 아마.

고마운 옆집 아이는 여전히 내 친구지만, 요즘은 일 년에 한 번도 겨우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더 이상 옆집이 아니고, 아이도 아니기 때문에.  


중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기는 쉬웠다. 다른 학교에서 온 애들은 내게 '너 ㅇㅇㅇ 친구지?' 라며 말을 걸었고, 나는 그저 받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중에 A가 있었다. 넉살 좋고 장난을 잘 받아주는 A 덕분에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다. 학교를 가기 전에 늘 A네 집으로 가 함께 등교했고, 학교가 끝나면 A네 집에서 해가 지기 전까지 놀았다. 그대로 잠을 자고 학교를 간 날들도 허다하다. 모든 게 잘 맞았고, 웃음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1년쯤 지낸 후, 내 잘못 탓에 우리는 서로 싸웠고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먹다짐을 했다. 참 못난 나였다. 졸업할 때까지 그 친구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서로 화해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우린 남이 되었다.


신설 고등학교에 5명이 배정됐는데 러시안룰렛의 총알이 내게 박혔다. 나머지 4명은 3년간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뭐야 중학교도 편입생이 있었나' 차마 그 4명을 모으지 못한 채 혼자 학교를 갔다. 처음 2주 동안은 쉬는 시간에 엎드려만 있었다.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왜 내게 말을 안 걸어주지?' 그동안 내가 잘나서 친구들이 생긴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 생긴 학교는 명문고로 거듭나겠다는 열의로 야자를 의무화했고, 덕분에 벙어리로 지내는 시간은 밤 10시로 늘어났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내게 관심이 없던 반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난 철이라고 해'

걱정과 달리 반 친구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고, 그 뒤로는 여섯 살 때 내게 벌어진 일과 같았다. 내 생애 가장 외롭고 길었던 그 2주는 내게  '나'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친했던 고등학교 아이들을 갈라놓은 것은 이 땅의 고마운 대학 서열화였다. sky 서성한 중경외시 쭉쭉쭉.. 한 뼘 땅덩어리 위의 몇 안 되는 대학들을 중복 하나 없이 깔끔히 나눠놓은 탓에 우리는 모의고사 성적이 나올 때마다 어색해졌다. Out of score, out of mind.


친구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서였을까(는 핑계),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고 '대학교 친구는 오래 못 간다. 동네 친구들이 진짜 친구다'라는 말을 먼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을 통해 귀가 닳도록 들었다. 친구들의 세뇌 덕분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나를 온전한 나로 봐주는 친구는 대학교에서 사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도 동네 친구들만큼, 그 친구들보다 더 친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었다. 친구들아 니들 말 다 틀렸어, 근데 니들 왜 내 전화 안 받냐. 또 대학 친구들이랑 술 마시냐?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아 만나지 못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먼저 졸업을 한 친구들은 마치 용신을 불러낸 후의 드래곤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옆 학교, 옆 동네가 아닌 전화번호 앞자리가 바뀌는 곳으로. 격언은 유효했다. 다만 시기가 달랐을 뿐이다.


무관심, 자존심, 욕심 때문에 한 때는 소중했던 그들과 멀어졌다. 멀어졌단 사실이 아쉽지 않을 만큼 무덤덤해졌고, 그들이 없는 삶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떠한 잡음도 없이 이전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제는 아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다행이면서도 서글프다.

나만의 바람 혹은 헛된 희망일 수 있지만, 나는 언젠가 그들과 다시 가까워질 거라고 믿는다. 예전처럼 한겨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동네 호프에서 그 친구는 맥주를 먹고, 나는 사이다를 마시면서. 아니면 어느 날 커피 한잔하자는 갑작스러운 연락이 와서 다시 만나게 될 때, 당신들이 부재했던 날들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다고 하루 종일 떠들고 싶다.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날의 말들을 위해서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 당신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 좋겠다.



어제 고등학교 친구들을 잠깐 만났는데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연락이 끊긴 동창들 이야기를 했다. 괜히 기분이 센치해져서 이런 글을 썼다. 처음 만난 그때에서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어제 본 녀석들은 다들 열일곱, 열여덟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휴, 좀 변해라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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