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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어디 안가?' '요즘 여행 안 가네'
작년부터 친구들에게 듣던 말이다. 대학교를 들어간 이후로는 방학 때마다 국내나 해외를 여행하는 게 목표 아닌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 학기 중에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여행에 투자한 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돈을 모으는 생활을 2년 정도 했었다. 방랑벽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나조차 내게 그런 증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취업준비생'이라는 벼슬을 부여받은 뒤로는 여행을 가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주변의 시선, 남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두려움 등 여러 요인 때문에 내 발을 스스로 묶었다. 체념하고 나니 여행을 안 가는 삶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어차피 달라지는 게 없었다면 그냥 갔어도 됐을 텐데 아마 취준생이시거나 취준생이셨던 분들은 내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아시리라 믿는다..
여행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익숙지 않은 공간을 걸으며 다른 언어를 써야 되고, 차라도 빌리면 전혀 다른 교통신호 탓에 애를 먹는다. 예약하고 갔던 방이 인터넷 사진과 달라 멍해질 때도 있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쪽잠을 자며 버틸 때도 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할 수도 있고, 잘 지냈던 친구들과 이역만리에서 다투기도 한다. 이렇게 귀찮고 힘들 바에야 그저 집에서 여행 사진이나 보며 상상하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싶은 순간도 찾아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떠나고, 돌아오면 다시 여행을 계획한다. 사진으로 봐도 충분한 곳을, 여행을 통해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떠나려고 한다. 갈수록 짐은 가볍게, 기대는 덜어내고 부유하듯 떠난다. 그저 세 끼 중 한 끼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바라면서, 박물관에서는 괜찮은 그림 하나만 만나기를 바라면서. 여행은 지긋하지만 기분 좋은 반복이다.
여행은 티켓을 구매하면서 시작된다. 여행이 여행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티켓이 왕복 티켓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여행이다. 정해진 시간만큼만 그곳에서 머물고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지루하고 평범하게 보이던 나의 도시를 여행은 다시 애정 섞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을 두고 바람을 핀다면 쌍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만 도시는 한 번씩 하는 외도를 덤덤히 허락해준다.
여행은 지역별로, 시기별로 나눌 수도 있지만 여행을 혼자서 하는지, 동행이 있는지에 따라서 여행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동행이 주는 기쁨에 관하여 짧게 쓰고자 한다. 두 여행 모두 소중한 '시간'으로 남지만 혼자 한 여행은 '공간'이, 함께 한 여행은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한 공간에서의 시간을 여럿이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세월 탓에 잊어버린 그때의 나를 기억해주고,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그때의 친구들을 나는 기억한다. 서로가 있는 한 언제든 그 날의 여행을 다시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보며 어딘가를 떠올리고, 어딘가를 마주할 때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일은 동행만이 주는 특권이다.
여행과 관련한 글을 쓰니 다시 떠나고 싶어 진다. 오랫동안 닫힌 여권에는 어느 나라의 도장이 언제쯤 다시 찍히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