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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May 27. 2016

예술이라는 방패 뒤에 숨는 사람들

소설 <채식주의자>, 다량의 스포 주의

 대한민국 평균보다 아주 조금 더 책을 읽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 나에게도 한강 작가의 영국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전라도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으면서 5월 18일의 뉴스만 봐도 눈물이 나는 나에게 그녀는 언젠가 꼭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것이었다. 우선,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소년이 온다> 보다 이전에 출간된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어 보았다.

 <채식주의자>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거라곤 책 제목과 작가 이름뿐이었다.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채식주의자는 어제 하루 종일,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도 이렇게 나를 강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독특한 시점 설정이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온갖 폭력들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룬 것이다. 개인적으론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솔직하고 적나라해서 속이 다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 특히 몽고반점을 읽을 때는 뭔가 먹으면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몽고반점을 읽을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평소 비위가 강한 편인데도 입맛이 다 떨어질 뻔했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은 말 그대로의 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하는 폭력에 대한 영혜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 저항마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정상'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정상'의 상태로 영혜를 되돌려 놓으려 할 뿐, 영혜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영혜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혜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영혜에게 '왜 고기를 먹지 않아?'라고 물어놓고 영혜가 하는 이야기는 무시한다. 영혜에게 일종의 혐오감을 느낀다. 기괴한 꿈 이야기 따위를 들으며 영혜의 고통을 떠안고 싶지 않다. 영혜의 부모님을 포함한 남편, 형부, 언니 모두 마찬가지다. 형부는 영혜에게 호의적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성욕을 풀 대상으로 대하는 것뿐이다.


 책 뒤에 달린 어떤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나 인터넷으로 찾아본 다른 분들의 해설은 나에겐 너무나도 차갑게, 영혜에게 또 하나의 폭력을 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던 본성이 드러난 것뿐, 돌을 던질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래, 본성이라는 것 까지는,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돌은 던져야겠다.

 

 "누군가는 그를 동물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종의 연대기적 계보와 무관하게 흘레붙는 개들을 보면서 막연하나마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런 장면이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누선을 건드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가족이라는 제도는 다양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서로 다른 씨족 혹은 부족에 속했던 자들이 모종의 계약과 교환을 거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서로 아무런 문화적, 정서적 친밀감이 없다고 하더라도 친밀감을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후자의 친밀감은 철저하게 법 안에서의 친밀감이요, 법이 허용하는 만큼의 친밀감이다.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친밀감이라도 느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친밀감의 정도를 조절하라고 동시에 강요하다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의미를 폭파하지 않는가? 법이 승인한 대로 친밀감을 느꼈고, 가속도가 붙은 친밀감으로 말미암아 몸의 내밀함을 좀 더, 갈망하게 된 그를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평론가의 해설 中


 영혜의 몽고반점이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줬다며 처제인 영혜와 성관계를 맺은 형부를 평론가는 이런 식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비도덕적 행위들에 대해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작가가 면죄부를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혜의 형부처럼 자신의 수준 떨어지는 작품을 예술로 포장하는 몇몇 예술가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현란한 언어로, 색채로, 영상으로, 소리로 포장한다고 해서 추악함이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다. 평론가의 말대로 정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인간은 동물이다.", "가족제도는 인간을 얽매는 제도이다."였다면 몽고반점은 한낱 삼류 야설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라는 한국 소설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데 있어서는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부커상 선정 위원회는 “불안하고 난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 <채식주의자>는 현대 한국에 관한 소설이자 수치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갇힌 한 육체가 다른 갇힌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시도들에 관한 소설”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 소설에서 진심으로 다른 육체들에 대한 이해를 시도 하는 것은 영혜의 언니뿐이다. 남편은 조용하고 평범한 줄만 알았던 아내가 자꾸만 독특한 행동을 하자 이해해보려는 시도조차 않고 떠나버렸고, 형부는 영혜의 고통을 자신이 영혜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작가가 그런 폭력들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미화하고 싶었다면, 형부가 영혜에게 전화를 걸어 접근할 구실을 만드는 장면에서 '스스로를 경멸하며, 자신의 위선과 책략을 소름끼치게 실감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와 같은 문장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류의 영화를 정말 싫어한다. 마치, 이게 인간의 본성이니 부정하려 들지 말라고 내게 강요하는 것 같다. 채식주의자도 언뜻 보면 그런 영화들과 같은 맥락인 것처럼 보이나 그것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혜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 비쩍 말랐음에도 저항하는 힘만큼은 대단했던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혹시나 내 주관적인 해설이 작가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작가님의 인터뷰나 각종 해설들을 찾아보았으나 정확한 무엇을 찾을 수 없었다. 작가님이 언젠가 속 시원한 인터뷰를 한번 해주셔서 그것을 토대로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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