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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Jul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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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길 참 잘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제목 하나 정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처음이다. 집에 돌아오면 이번 여행에 관해 글 하나는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여행기에 대한 나쁜 편견을 갖고 있는 터라 막상 내가 그런 글을 쓰려고 하니 혼자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 여행기는 너무 뻔한 자랑 같고, 읽는 독자들의 반응도 '와 좋겠다, 재밌었겠다, 나도 여행 가고 싶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명한 여행 작가들의 책도 잘 읽지 않고, 내 여행에 관해서도 일기는 쓰더라도 이렇게 제대로 글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아무리 지지부진한 여행기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렵지만, 그래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몇 가지만 간단히 써보려고 한다.


 스물다섯의 여름엔 뭘 해야 좋을까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제주행 비행기 티켓이 싸게 나온 걸 알고 충동적으로 결제해버렸다. 결제할 땐 누구와 함께 가도 좋고, 혼자 가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지만 6박 7일 여행을 진짜로 혼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사실, 제주공항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물론 제주도 좋지만 한국말이 안 들리는 곳으로 떠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 '제주에 오길 참 잘했구나'하고 매일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행복지수를 끌어올려준 건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의 힘도 컸지만, 그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게 해 준 건 제주의 사람들이었다.


 몇 년 전 유럽여행을 하면서 살면서 한 번도 기대해본 적 없던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에 충격을 받고, 나도 마음을 열고 더 좋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지만 한국에서 그런 마음을 오래 유지하긴 어려웠다. 적극적인 친절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서로 피해만 주지 않길 바라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지내다 보니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땐 늘 정중하지만 딱딱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우리나라 여행을 할 땐 절대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확신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그냥 산책이나 많이 하고 올 거라며 무덤덤하게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내게 제주 사람들은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선뜻 마음을 내주었다. 


 처음 날 놀라게 하셨던 분은 택시 기사님이셨다. 한국에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택시는 마냥 편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카드나 큰 단위의 지폐로 계산을 하거나,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다거나,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기사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기사님들이 잔소리를 하시거나 눈치를 주고 심할 땐 화를 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제주에서 만난 기사님들 중 어떤 분은 목적지에 다 와갈 때쯤 "제가 아직 밥을 못 먹어서 그러는데 목적지 근처에 식당이 있나요?"하고 묻자, 식당은 목적지에서 좀 더 가야 나온다며 그럼 자기가 여기서 미터기를 끄고 식당 주변까지 가주겠다고 하셨다. 육지에서 만났던 기사님들은 주로 어떻게든 100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셨는데,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분은 처음 봐서 고마우면서도 정말 많이 놀랐다.


  이 분 외에도 버스나 택시 기사님들은 다들 친절하셨고, 늘 웃으면서 대해 주시는 동네 어르신분들이나, 가게 주인분들 덕분에 혼자 다녀도 늘 즐겁고 편안한 마음일 수 있었다.


 이번에 내 운이 좋았던 것인지 몰라도, 여행의 마지막 날까지도 어떤 서점 주인분으로부터 따뜻한 마음을 받고 돌아왔다. 그분은 젊은 여자분이셨는데, 내가 서점에서 한참을 뺑뺑 돌다 겨우 마음에 드는 책 두 권을 골라 계산을 하며 "저쪽에 있는 소파에서 잠깐 쉬었다 가도 될까요?"하고 묻자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하셔서 "네, 감사합니다."하고 뒤돌아서는데, "차 한잔 드릴까요?"라고 하시는거다. 카페를 겸하는 곳도 아니었고, 내가 그 서점의 단골 일리도 없는데 말이다. 친절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서점에서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호의 이상이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스커피도 있다고 하셨지만, 커피를 못 마시는 내가 한사코 차를 마시겠다고 하자 차는 따뜻한 것밖에 안된다며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시는 언니는 정말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를 기다리며 했던 이런저런 생각들 중 하나는, 이렇게 사람냄새 나는 곳에서 살 수 있다면 평생 호사스런 사치 한번 못 부리다 죽어도 괜찮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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