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수 Oct 16. 2016

제발..조언을..멈춰주세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조언들을 듣게 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선, 내가 필요해서 얻게 되는 조언은 그것의 실제 효용에 상관없이 일단 고마운 마음으로 듣는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내어주는 시간과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듣게 되는 조언은 내게 아무 쓸모가 없음은 물론이요, 인간관계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재난에 다름 아니다. 그 조언을 해준 상대방과 나의 좋았던 사이까지 다시 고려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예로, 요즘 사람들이 명절을 불편하고 피곤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를 굳이 다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조언의 형태를 '자기만족형 조언'이라 부르려 한다. 그런 조언을 하는 사람은 조언을 듣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서, 그 조언의 쓸모라고는 결국 조언을 하는 사람 혼자만의 만족감 고취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언을 듣는 상대방의 상황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20대 초반까지는 이런저런 조언들이 효용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며 스스로 발품 팔아 온갖 조언들을 쫓아다닐 때이므로, 굳이 내게 당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단은 기꺼이 듣고 본다. 들어보면 왠지 다 맞는 말 같고, 그 조언만 따르면 나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 조언들 중 일부는 제대로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일부는 나를 더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이 축적되어, 어느 정도 경험치를 쌓고 나면 내게 맞는 방식을 찾게 된다. 내가 욕심을 내도 될 부분과 그만 단념해야 할 부분들을 알게 된다. 남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의 생존 방식이고,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선인지 아닌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최선이 아니라면 최선이 아님을 깨닫는 것도, 어떤 방식으로 바꿀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에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꾸 미련이 남고,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더 이상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결론을 짓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그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라고 타인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이 어떻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20대 초반한테는 아무 조언이나 막 해도 되지만 20대 중반쯤 된 사람한테는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걱정되어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무슨 말을 해주고 싶다면 제발 눈치껏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나 정말 진심이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애틋한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그러나 '너보다 인생의 진리를 먼저 깨달은 나'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사람은 아무리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라고 너스레를 떨어대도 와 닿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조언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먼저 조언 좀 해주세요" 하지 않는 한,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은 그래도 코웃음 치며 쉽게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한순간의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감에 한껏 취한 표정으로 내 아픈 부분을 쩍-하고 쪼개어 버리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 순간은 그리 쉽게 잊을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