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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Jul 16. 2017

리틀 포레스트

충만한 삶에 대하여

 "자신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배운 것... 자신이 진짜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언젠가부터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 몸으로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던 게 있었다. 그게 아마 이런 이야기였나 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대사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이렇게 잔잔한 일본 영화는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는다. '초속 5센티미터'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너무 질려버렸기 때문에, 그 비슷한 느낌이라도 들 것 같으면 아예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 영화도 틀고 나서 한 10분 정도만에 '아.. 끄고 딴 거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무언가가 나를 화면 앞에 자그마치 110분이라는 시간 동안 얌-전히 잡아두었다. 내용이랄 것은 없다. 대학생쯤 되는 여자애가 작은 농촌 마을에서 마치 구석기, 신석기 시대상을 재현하는 양 수렵, 채집, 농사 등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보여주는 게 전부다. 촌스럽고 미개하다는 의미로 구석기, 신석기를 들먹인 것이 아니다. 나한테는 이 영화가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천성이 느리고 게을러서 노동을 좋아하지도, 요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 대한 첫인상은, 여자 주인공이 참 맑은 느낌으로 예쁘고, 조용한 풍경이 좋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농촌의 삶을 동경해본 적이 없고, 영화를 다 보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처음으로 저런 삶도 괜찮겠구나 싶어 졌다. 단순히 보기에 좋아서가 아니라, 충만한 삶이라는 건 저런 인생을 보고 쓰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충만한 삶'이라는 말은 참 거창하다. 왠지 기독교인들이 좋아할 말일 것도 같고, 뭔가 하루하루를 엄청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랑은 거리가 먼 느낌이 든달까. 그런데 주인공 이치코가 살아가는 모습은 나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루하루를 비슷하지만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아주 똑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이치코의 삶이 더 충만하게 느껴진 것은 '체험'의 차이일 것이다. 내가 나무 위에 올라가 본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아니 그래 본 적이 있기는 한가? 나는 밥도 귀찮아서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햇반 데워먹기 일쑨데. 생선 손질을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나는 아직까지도 기름, 불, 칼 같은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기름이 튈까 무섭고, 손가락이 베일까 무섭다. 요리랑은 담을 쌓고 사는 수준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이다. 단순히 요리를 안 하고 사는 것에 대한 자괴감뿐만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손으로 만져보고, 뭔갈 만들어내며 살아가는, 그런 삶은 고등학교 2학년쯤부터 완전히 끊어졌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음식을 돈을 주고 사 먹고,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을 돈을 주고 듣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돈을 주고 보고, 언젠가부터 나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나쁜 삶은 아니었지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삶이었다.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계획했던 건 아니었는데, 흘러가는 대로 두다 보니 이렇게 됐다. 모든 선택은 분명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선택들이 나를 채워주진 못했던 것 같다. 종종 내 인생에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난 것처럼 차고 허한 감정이 올라왔던 건, 아마 실질적으로 채워지지 못한 영혼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비의 일시적인 쾌락만 쫓아다니면서, 좋은 경험들로 나를 채우는 중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어떤 것들이 남아있나.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글만큼은 씁쓸한 자기반성으로만 끝맺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충만한 삶에 대해 미세하게나마 도전 의식 같은 것이 피어올랐기 때문에, 오늘은 나 자신을 응원해주고 싶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내 인생을 꾸려왔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 또한 느낄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오늘 했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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