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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Jul 24. 2017

딱 한 겹의 포장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하고 너절한 우리 관계. 선택할 수 없었기에 후회조차 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은 내게 복(福)일까요. 서로를 사랑한 기억이 너무 아득해져 그리워할 추억조차 없는 지금 이 순간은요. 어쩌다 한 번씩 엄마의 추억 속에서나 만났으면 좋았을 우리는 왜 20년이 넘도록 함께 해야만 했을까요. 당신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얘긴 거짓말이고 합리화일 뿐이에요.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태어나서 가장 소원한 건 내 성적이 잘 나왔으면, 내가 더 예뻐졌으면, 우리 집이 부자가 됐으면-이 아니었다고. 내가 진심으로 손을 모아 기도한 건 오늘부터라도 좋으니 제발 저 사람을 더 이상 안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고. 그때 나는 어떤 상상들을 했을까요. 나는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불쌍하지만 미안하진 않아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이런 날 비난하며 떠나더라도 나는 변명하지 못해요. 나는 자책하지 않아요. 최소한 내가 자책이라도 해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나는 우리 이야기가 아름답게 남길 바라지 않아요. 아주 더럽고 냄새나서 다시 꺼내보기도 싫은 기억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나는 사실이 사실대로 남는 게 좋거든요. 누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었다는 사실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해요. 아, 이 점에서도 우리는 아주 다르겠죠. 당신은 감상적이고 포장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이번엔 나도 나 자신을 위해 포장을 한번 하려고 해요.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너무 다른 하우스 메이트 같은 거였다고. 비록 연약한 비닐포장일지 몰라도 맑은 하늘에 후두둑 비 떨어지는 날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포장은 이정도면 딱 좋아요. 오래 걸리지도, 오래 가지도 않을만큼의 포장이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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