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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Nov 13. 2017

그리스인 조르바와 불멸을 떠나보내며,

이동진식 책 읽기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알라딘에 책 팔기다. 삼시 세끼 꼭 제때 챙겨 먹는 내가 아침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슨 신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떠나보낼 책들을 마구 골라냈다. 책은 사실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미니멀리즘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게 2015년부터니까 어느새 2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혹시나 싶어서 보관해두고 있는 책들이 많다. 책은 어쩐지 사용하지 않는 화장품들 버릴 때처럼 쉽게 휙휙 처분할 수가 없다. 마음에 안 들었던 책이었더라도 ‘좋은 책인데 내가 뭘 잘 몰라서 그런가? 다음에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책도 그저 일종의 물건, 소모품일 뿐인데, 다른 물건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아마 책이라는 존재를 지식인의 전유물, 우월한 문화의 상징 같은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바꿔준 게 이동진의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라는 책이었다. 이동진은 독서광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신의 독서 역사, 독서 습관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책이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아이돌 팬들끼리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해 수다 떨 때의 재미가 이런 거겠구나 싶어 진다. 어떤 책이 좋더라, 하는 이야기는 종종 하지만 사실 책을 읽는 인구 자체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그 말 조차 무슨 노래가 좋더라 하듯 자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다 보니 ‘독서’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이동진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니 요즘 말로 ‘덕질 메이트(같은 분야의 팬인 친구)’랑 노는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을 한번 느끼고 나니 다른 친구들과도 ‘독서’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책을 더 좋아하게 됐다. 무튼 그 책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글이 있었는데, “책을 숭배하지 말아요”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무엇을 숭배한다면, 그것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동진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책을 ‘하대’하라고 말한다. 읽기 싫으면 집어던져도 되고, 내가 필요한 부분만 읽어도 되고, 찢어도 된다고 한다. 심지어 책을 ‘물리적인 종이 모음집’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를 유지하는 것’이고,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같은 건 없다고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책을 소중히 모아 두고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물론 이건 이동진 개인의 성향일 뿐, 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은 또 각자의 방식들이 있겠지만, 내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읽는 것 또한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취미 생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책들을 억지로 읽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책이라는 존재가 예전에는 ‘재밌기도 하지만 재미가 없어도 읽어야 하는 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면 이제는 순전한 ‘재미’만을 주는 긍정적인 존재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불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이석원의 에세이집 등등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불멸이란 책은 어제 택배로 받아 40페이지밖에 읽지 않은 책임에도, 40페이지를 읽는 그 잠깐의 시간이 큰 고통이었으므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약 50페이지를 읽었고, 이석원 에세이집은 둘 다 완독 했다. 하지만 이 책들이 내게 남긴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책들은 내가 이렇게 떠나보냈지만 내 기억 속에 아주 똑똑히 박힐 것이다. ‘여성 혐오’를 마치 고귀한 것인 양, 대단한 진리인양, 돈 받고 팔아먹은 책들로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처음부터 남자 주인공이 수영하는 여성을 관찰하며 새로운 여성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성을 무슨 물건 감상하듯 감상하는 태도 자체도 유쾌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 뒤로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 상상 속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주인공은 길에서 마주친 다른 여성이 옷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입었다는 이유로 흉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추해지게 되면 남들이 자기 외모를 보지 못하도록 늘 꽃을 사서 안고 다니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그 여자 주인공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목욕탕에서 한심하게 수다나 떨고 우스꽝스러운 기계를 몸에 두르고 살 빼는 데나 열중하는 여성들,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오토바이 타는 젊은 여자,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은 자신을 방해하는 어머니 등등. 전형적인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자다, 남성들의 굳건한 의리와 우정과는 반대로 여성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못난 존재라고 하는 여성차별적인 말)’ 프레임을 아주 노골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러면서 남자 주인공이 다른 남자인 친구와 수다 떠는 것은 인생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행위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들은 멍청하고 시끄러운 존재, 남성들의 성적 욕구 해소용으로만 존재한다. 이석원의 에세이집들은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그 정도가 옅어지고 좀 더 예쁘게 포장되어 있을 뿐 별반 다를 것 없다.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스테디셀러로 소비되면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박혀 여성 혐오적 사상을 재생산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인 내가 읽어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과연 존재할까?

 

 이런 책들을 읽을 때 내 기분을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잘생기고(예쁜) 미국 배우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시아인들은 아무래도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조금 부족하긴 하죠. 그래도 저는 아시아인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깨어있는 시민이니까요!”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불쾌해하고 있는데, 내 주변에 있는 백인, 흑인, 황인종 모두가 손뼉 치고 환호하고 있다. 심지어 분노해야 할 아시아인들 중에는 그 연설을 명연설이라며 소개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차별을 인종차별로 바꿔서 설명하자면 정말 이런 느낌이다.


 나는 아무리 유익한 내용의 책이라 해도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폄하하는 문장들을 그것이 현실이고, 진리이며, 아름다운 것인 양 보기 좋게 포장해놓은 그런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쁘고 심오한 단어들의 조합에서 행간을 읽고 문맥을 읽어 진짜를 파악해야 한다. 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숭배해서는 안된다. 오늘은 그 다짐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나는 이동진의 취향을 좋아한다. 그의 취향을 신뢰하고 따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추천한 “불멸”의 40페이지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떠나보내기로 한다. 이 책 팔아서 더 재밌는 책 사야지. 오늘의 일기 끝.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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