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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Dec 19. 2017

힘들어하는 날 제발 먼저 눈치채 줘

 어떤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샤이니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종현은 "이 사람 참 괜찮지?" 하고 자랑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힘들었다며 자길 보내달라는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너무 아프다.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되나 사실 고민이 된다. 나는 그 사람의 열렬한 팬도 아니었고, 그의 우울을 사랑한 적도 없다. 오히려 외면했었다. 나에게 연예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품이었다. 그 또한 다를 게 없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와 고운 목소리, 다정한 성품을 좋아했지만 그의 우울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 그냥 원래 좀 섬세한 성격인가 보다.' 그게 다였다. 그가 우울을 내비치기 시작할 때쯤 나는 그 사람을 떠났을 것이다. 그는 예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그런 상품이 아니었으니까. 싫어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레 관심이 없어졌다. 세상엔 더 좋은 상품이 많으니까.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존재가 나에게 더 큰 의미였었나 보다. 이제야 깨닫는다.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다정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위로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팬이었다고 말하기도 힘든 내가 그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는 것은 그가 나 같고, 내 친구 같아서일 것이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대한민국. 이 수식어는 하도 많이 들어서 무감각해질 지경이다. 당장 나와 가까운 사람이 자살하지 않는 한, 사실 체감하기 어려운 숫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에 이른 수치 말고, 자살 생각을 하면서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수치를 따지면 더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에이, 내 주변엔 그런 사람 없는데?"라고 쉽사리 단정 짓는 사람이 있다면 난 아마 속으로 '좋겠다, 저렇게 해맑을 수 있어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병들어 있다. 부정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보다 배부르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살릴 수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한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바른말을 하고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꼬이고 뒤틀린다. '다 내가 모자라서 그렇구나, 내가 이상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다 너덜너덜하고, 미친 현실에서 잘 지내기 위해 조금은 미친 채 살아간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고 싶진 않다. 다만, 너무 우울해서 듣기 힘들었던 그의 목소리와 가사가 이제야 내 마음에 와 닿는 게 많이 미안하고 아프다. "힘들어하는 날 제발 먼저 눈치채 줘 못난 날 알아줘 제발 날 도와줘" 그는 삶을 쉽게 놓은 게 아니었다. 소리치고 있었다. 많이 아프고 힘들다고. 그에게 돌아오는 "니가 멘탈이 너무 약해서 그래, 마음을 강하게 먹어봐, 뭐 그런 일로 그렇게 힘들어해,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 생각해봐" 그런 말들이 그를 더 무너뜨렸을 것이다. 섬세하고 여린 사람의 장점이 죄다 단점으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들이다. 성격상 남 탓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혼자서 다 끌어안고 자책하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일의 내가 없기를 바라는 그 심경을 감히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내가 놓아버리려고 했던 친구가 자꾸 생각나서 하루 종일 눈물이 그치지가 않는다. 좆도 모르면서, 니 마음 다 안다고, 힘내라고, 우리만 힘든 거 아니라고, 착한 척, 응원하는 척, 좋은 친구인 척하며 행복을 강요했던 내가 싫다. 나도 정신과 다녀봤으니까, 나도 웬만한 마음 고생은 웬만큼 다 해 봤으니까, 다 아는 줄 알았다. 나를 자꾸 끌어내리는 것 같은 친구가 버거웠고, 가끔은 내가 더 힘들다고 건방을 떨었다. 그 친구가 괜찮아지길, 행복해지길 바랐지만 사실 그건 내가 친구를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가만히 들어줬어도 좋았을 텐데.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는 오늘도 나에게 폐를 끼치진 않았을까, 자신의 우울이 사람들에게 해가 되진 않았을까, 자기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내 문자에 안도감과 고마움 같은 게 뒤섞여 눈물이 나서, 자고 일어나서야 답장을 보낸다는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어린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나밖에 몰라서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걸까. 나는 내가 무섭다. 나는 아마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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