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편을 홀린 아이스 커피
이탈리아 커피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남편도 처음엔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는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국의 날씨와 아메리카노의 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것과 취향 존중 그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다. 남편이 푸른곰팡이가 가득 핀 고르곤졸라 치즈를 포기할 수 없듯이 나도 커피 취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 검은 머리 동양인 아내 덕분에 이탈리아 남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함께 외출한 찌는듯한 여름날, 곰 같이 덩치가 큰 남편은 그날도 어김없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내 가방 속에는 짤그랑짤그랑 얼음 소리를 내는 텀블러가 있었고 그 속엔 설탕을 탄 달콤 쌉싸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평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남편도 그날따라 너무 더웠는지 내가 건네는 텀블러를 받아 들고 연신 고개를 뒤로 꺾으며 목을 축였다. 그리고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뭐야? 달콤해! 맛있어!"
"그치? 그것 봐, 여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까! 아니 도대체 왜 이탈리아엔 이걸 안 파는 거야?"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를 마셔 볼 수 있는게 다 한국인 아내를 둔 덕이라는 듯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을 그에게 지어 보였다. 이후 남편은 종종 집에서도 스스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며 나쁘지 않다고 평했다. 피자 1조각에 질려하던 한국 여자는 1인 1 피자가 가능해졌고 물에 희석한 커피는 최악이라던 이탈리아 남자는 아메리카노의 매력에 빠져들며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물들어 갔다.
아메리카노의 매력을 알게 된 이탈리아 남편을 등에 업은 김에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보기로 했다. 커피 부심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경악할지 모를 주문이지만 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가 봐도 외국인이니 내심 너그러이 주문에 응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동네 카페 두 군데에서 시도한 결과, 매장마다 방법이 모두 달랐고 심지어 같은 매장이지만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만들었다. 어떤 곳은 에스프레소와 얼음 컵 그리고 따뜻한 물을 주기도 했고 어떤 곳은 휘휘 저어버려 얼음이 다 녹아버린,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커피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주문할 때마다 내겐 너무나 당연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평생 단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셔본 적도,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커피들이 눈앞에 놓였다. 커피 한 잔을 시켰을 뿐인데 테이블 위에 여러 잔들이 나열되는 것을 보며 웃기기도 했고 번거롭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다. 내 앞에 놓인 커피를 흘깃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작은 시골 동네에 흔치 않은 동양인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민폐일지 모르니 아이스 커피를 주문해도 되냐는 아주 조심스러운 물음에 본인도 새로운 시도라며 흔쾌히 승낙해 주고 제대로 만들었냐며 물어오던 카페 주인의 친절함은 잊을 수 없다. 나의 작은 용기는 이렇게 소중한 추억을 남겼다.
이탈리아의 여름은 햇살이 정말 강렬하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열기로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르기도 한다. 장마가 시작되면 몇 날 며칠 해 구경이 어려운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비 구경이 어렵다. 치솟는 높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한국에 비해 훨씬 낮은 습도 덕분이다. 이른 아침과 저녁은 선선하며 온몸이 끈적이는 불쾌함도 없다. 한국은 열대야로 사람들이 더위에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지지만, 이탈리아에선 해가 지면 높았던 기온도 조금씩 떨어진다. 그렇기에 초여름만 되어도 땀띠로 고생하던 나는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한 이후 땀띠가 나본 적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첫해, 한국 여름이 익숙했던 내 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름을 났다. 입은 여전히 아그작 아그작 씹히는 얼음과 냉면, 빙수 등 한국 음식을 그리워했지만, 몸은 아주 천천히 이탈리아 기후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땀이란 것을 흘리기 시작했고 남편은 꿉꿉해 죽겠다던 미미한 습도도 느끼게 되었다.
이탈리아 생활 4년 차부터 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의문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없는 식당,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야외 테이블이 놓인 거리, 나는 자야 할 시간에 시작하는 저녁 식사, 집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햇빛을 차단한 창문 등 불만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식당에 에어컨이 없는 건 아무리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그늘막이 있는 야외라면 식사하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인들처럼 태양을 피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그을린 피부를 만들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햇볕을 쬔다. 이후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8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야외에서 식사를 즐기기 때문에 에어컨이 굳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는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시원한 얼음으로 모든 더위를 날려 버리는 한국과는 달리 굳이 얼음이 필요 없는 기후인 이탈리아. 몸이 이곳 날씨에 점점 익숙해지자 오독오독 얼음을 씹고 나서 추위에 파르르 떠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고 동네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던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처럼 처음엔 머릿속을 물음표로 가득 채웠던 의문들이 경험을 통해 점차 느낌표로 변했고 다름에서 오는 문화차이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고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는 이유를 이해했다고 해서 모든 차이를 알게 됐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은 '도대체 왜~!' 하며 마음의 소리를 내지르는 경우가 더 많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이탈리아를 이해해 가는 중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