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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 Jun 13. 2023

안녕, 흰머리야

오늘,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나의 흰머리


거울을 보며 슥슥 빗질을 하는데 순간 두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보였다. 반갑지 않은 그 얼굴, 그건 바로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사라진 흰 머리카락 한 올이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이 불청객을 찾아내야 했다. 심호흡 한 번 내쉬며 순간 시끄러워진 마음을 진정시킨 후, 아이가 잠든 침실의 커튼을 열듯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살짝 젖혀보았다.


'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넘겨보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존재감을 뿜뿜 내뿜고 있는 흰 머리카락 한 올을 찾아냈다. 도대체 얼마나 꽁꽁 숨어 자라왔을지 모를 이 길쭉하기 짝이 없는 존재를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건 아마도 샤워 후 군대 내무반에서나 볼 법한 모습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쓱쓱 털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긴 생머리를 찰랑찰랑 거리는 사람이었다면 혹은 화장을 하기 위해 매일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면 더 빨리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장에 영 관심이, 아니, 투자를 하지 않는 나였기에 흰머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야가 닿지 않을 뒤통수 어딘가에도 흰 머리카락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유독 눈에 띄는 한 올의 흰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 홀로 흰 머리카락과 찐한 눈싸움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가, 아니 내 신체가 늙어가고 있구나... 내게 찾아온 현실이구나 '


실은 흰 머리카락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의 달갑지 않은 첫 만남은 정확히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나는 그날 왠지 모를 서러움에 엉엉 울고 말았다. 무엇이 그리도 슬펐던 것인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나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가 30살이었을 때 흰머리가 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노화가 이리도 빨리 시작됐다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힘든 타국 생활과 일찌감치 본인과 친구들은 새치 또는 흰머리가 가득했기에 나의 서글픈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이 미워 울었다. 이후 반갑지 않은 손님인 흰머리는 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고 보일 때마다 괘씸한 마음이 들어 뽑아내기 바빴다.



멋진 할머니 모델 린다 로댕 


“나이 드는 게 좋아요.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늙어가면서 제일 좋은 점은 지혜가 생긴다는 점이에요. 살면서 생기는 주름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오히려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느껴지는걸요?”

린다 로댕 (Linda Rodin)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염색하지 않고 백발인 모습대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이 꿈은 매번 염색을 해야 하는 일이 귀찮은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지만 모델로 활동하는 린다 로댕처럼 멋지게 늙어가고 싶은 소망이 담겨있다. 자연 백발의 할머니 모델을 꿈꾸면서 흰머리 때문에 슬퍼하는 인간이라니, 이중적인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서른 살, 흰 머리카락과의 첫 만남 이후 시간이 흘러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었다. 지금은 흰 머리카락을 봐도 전처럼 슬프진 않다. 철이 든 것인지 그저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알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선을 달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10대, 20대엔 젊음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노력 없이도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늙고 당연히 60대, 70대가 된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러나 서른이 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미래 즉, 노인이 된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 미래가 아직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지만 노화의 흔적을 발견할수록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백하건대 치열한 고민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후회한다. 그렇기에 남은 인생은 제대로 살고 싶다.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가 여간 쉽지 않지만 생은 영원하지 않고 죽음은 늘 우리 주변을 맴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항시 떠올릴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머리카락을 하나의 장치로 여기기로 했다. 매일 거울을 통해 듬성듬성 자라난 흰 머리카락을 보며 내가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말이다. 덕분에 생각하게 된다. 흘러간 과거보다 남은 생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나은 인간이 될 것인가를.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언젠가 지금 나이의 두 배를 넘고 한 두올이던 백발이 두피를 빼곡하게 채우게 되었을 때, 죽음을 들숨과 날숨으로 느끼게 되는 그날,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그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팬 주름만큼이나 영혼도 충만한 노인이 되어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순간이다. 
그렇다면 남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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