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자매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모님께 들었을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이다. 내가 어렸을 적엔 귀한 외동이든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하는 형제들이 많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학교 밖 어른에게까지 같은 말을 들으며 자라던 시절이었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같은 말을 해주기 때문일까. 한국인의 피에는 나누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DNA가 흐르는 듯하다. 그렇다. 나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다.
이탈리아에 살게 된 이후, 유독 한국인들이 맛있는 음식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선 친구와 식당에 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다른 메뉴를 시켜 나눠 먹거나 상대에게 ‘먹을래?’ 혹은 ‘한 입만!’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지금은 맛있는 걸 먹으면 진실의 미간을 찡그리며 옆 사람에게 어서 빨리 먹어보라고 재촉하는 모습을 TV 속에서나 볼 수 있다.
일본 워킹 홀리데이 시절, 어학원 친구들 그리고 일본 선생님과 함께 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리 다른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을까요?’라는 말 뒤에 붙인 말이 ‘한국 스타일로’였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가 일본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못했던지라 당시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일본 문화에 관련된 책을 읽고 나서야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나눠 먹는 문화가 당연한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선생님이 굳이 ‘한국 스타일’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를 그제야 이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곰곰이 일본 드라마에서 본 식사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 상 차림에 반찬을 함께 먹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가정 내에서도 각자의 반찬을 두고 먹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가'하는 의문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가다 한 사람이 타코야키를 샀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인이라면 돈을 누가 내었든 함께 먹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본인은 돈을 지불한 사람만 먹고 있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일본에서 이런 장면을 자주 목격했었다. 이렇듯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눠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DNA를 장착한 채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 때까지 권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가족들과 함께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어를 전혀 몰랐던 당시의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식전 빵으로 갓 구운 빵이 나오자 다들 하나씩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옆자리였던 남편의 어린 사촌 동생과 그 엄마의 실랑이가 눈길을 끌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빵을 권했고 아이는 지금은 먹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아이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밥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애쓰는 부모들이 많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게 왜 이해 못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지만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의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이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권유가 끈질기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끝내 아이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원치 않던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먹을 때까지! 바로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왜 그렇게까지 권하는지 백 보, 천 보 양보해도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가 거절했을 때 접시 위에 놓아둘 테니 혹시 생각이 바뀌면 먹으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선택권을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 없는 건 내게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유별나게 느낀 이 사건을 직접 겪게 되면서 고구마 백 개를 한꺼번에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왜?’라는 가벼운 의문은 ‘도대체 왜!!!’라는 울분이 섞인 느낌표로 변했고 어느 날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씩씩거리던 남편의 어린 사촌 동생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 위가 좋지 못해 한국에 살 땐 1년에 한 번은 위내시경을 받았다. 위장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마지막 내시경 후 들었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위가 남들보다 움직임이 없어 소화 능력이 많이 떨어져요. 게다가 불규칙한 식습관 때문에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위가 늘어나 있어요. 앞으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과식은 금물이고, 같은 시간에 식사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그걸 반드시 지키세요.”
이 말과 함께 작은 종이도 받았는데 술, 커피, 홍차, 건어물, 차가운 음식 등등 피해야 할 음식이 적혀 있었다.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죄수의 절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물었다.
“… 정말 여름에 아이스크림도, 빙수도 먹으면 안 되나요? ”
“그것뿐만 아니라 본인은 무더운 한 여름에도 찬물 말고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해요.”
우르르 쾅쾅! 의사 선생님의 단호한 한 마디에 마음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정신을 번쩍 차렸더라면 좋았겠지만, 그 작은 종이에 적힌 음식들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그러니 내 위는 지금도 항상 붉은 경고등이 켜져 있는 셈이다. 툭하면 예민한 위가 먼저 반응하는 나와는 다르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위가 아파본 적이 없는 남편과 살게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과 낯선 땅에서 살다 보니 나는 곱절로 예민해졌고 당연히 위도 나날이 민감해져 갔다.
남편 가족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덩치가 크다. 남편은 내 식사량이 자신에 비해 새 모이같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지 끊임없이 음식을 권했다. 배가 불러 거절하고 위가 아파 사양해도 식전 빵을 끈질기게 권유당했던 아이처럼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해 보았지만, 이런 노력은 매번 힘없이 수포가 되었고 결국 위는 탈이 나고 말았다. 한국처럼 당장 병원에 가서 내시경을 받을 수도 없기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끈질긴 식사 권유와 싸워 이기리라 다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고의 시간을 들여 싸운 끝에 승리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이러하다.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대치 상황이 지금도 벌어진다는 것. 남편은 여전히 먹을 걸 권하고 나는 거절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아, 이 끝나지 않을 전투여.
두 번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리에 없는 가족의 몫을 챙기지 않는 것이었다. 나에겐 탐스럽고 맛있는 딸기를 샀을 때 늦게 퇴근할 언니 몫을 미리 빼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정(情)이자 무뚝뚝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큰 딸기를 다 집어 먹고 보잘것없는 남은 잔챙이들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크고 먹음직스러운 딸기를 골라 남겨 두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나에겐 이런 너무나 당연한 행동을 생각지도 못하는 남편을 기함하며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매서운 눈빛 공격에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또한 같은 행동하는 것을 보고 서로 너무 정 없는 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론이 이렇게 나자, 언제부턴가 권하는 음식을 나중에 먹겠다고 말해서 ‘나중은 없어’라는 말이 돌아오면 그럼 안 먹어도 된다고 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만의 오해를 차곡차곡 쌓아 태산을 이뤄가던 어느 날, 이탈리아 생활 6년 만에 오랜만에 놀러 온 시누에 의해 의문이 풀렸다.
“음, 그건 이탈리아인의 특징이에요. 저도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첫 식사 자리에서 싫어하는 음식을 연거푸 권유받았죠. 안 먹으니, 맛이 없냐고 계속 물어봐서 곤란했어요. 이제는 제가 생선 요리를 싫어하는 걸 아시기에 준비하지 않으시죠. 어쨌거나 음식 권유는 차츰 익숙해질 거예요.”
그녀의 대답에 앞으로도 이 창과 방패 같은 권유와 거절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자라면서 먹을 때까지 권유하는 부모님께 짜증을 냈던 아이가 어른이 되면 그 부모처럼 행동하기에 음식을 권하는 문화는 대대손손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인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 싹텄다. 이날따라 질문이 폭발한 나는 그간 홀로 키워온 의문들을 다 파헤쳐 보겠다는 자세로 질문을 이어 나갔다.
“한국에는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란 말이 있어요. 그러니 그 자리에 없는 사람 몫도 미리 남겨 두는 것이 보통이죠. 그런데 여기선 나중에 먹겠다고 말하면 늘 나중엔 없다는 말이 돌아와요.”
단어는 물론이고 문법까지 엉망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정을 표정에 꾹꾹 담아 전달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욕조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순금을 판별할 수 있는 답을 알아낸 아르키메데스가 된 것 같았다. 깨달음을 얻어 속으로 기쁨의 유레카를 외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엔 그런 속담이 없어요. 대신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고 말하죠. 그러니 나중은 없는 거예요.”
이 대답을 듣는 순간, 먹을 때까지 권하는 이유와 정 없이 느껴졌던 남편의 모든 행동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비슷한 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던 무언가가 쑥하고 내려간 듯 속이 뻥 뚫리는 기분도 느꼈다. 한국 문화가 너무 익숙하고 당연했기에 남편이 이상하다고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 기준에서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준에서 생각한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본인에게 당연한 일이 타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해의 싹을 키울 수 있다.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나의 잣대를 상대에게 들이대지 않는 일이란 절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어른들은 다른 분야에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항상 세상에 관심을 두라고 말하나 보다. 익숙한 세상에서만 살면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다. 즉,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커질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크기만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도 옳다고 믿어온 나의 세상이 쩍하고 금이 가는 일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경험을 통해 내 세상을 넓히되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고 고정된 생각의 틀을 벗어날 기회이자 타인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름으로 삼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