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용기, 상처받을 용기

by 주디


그가 동굴에 들어가면 나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려 발버둥을 쳤다. 점점 줄어가는 연락에 지쳐도 걱정과 힘듦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업무에 집중을 하고 운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 바쁜 일상 속에 그가 내 마음에 박혀 있었지만 줄곧 억눌렀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다는데 이해하고 묵묵히 기다리면 되지. 우리는 노력이 필요한 사이였다. 그땐 내가 노력하면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 여겼다. 그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나에게 미안해서 함구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걱정과 불안, 그를 향한 마음이 전해졌을지 모를 편지를 남기고 다시 거리를 뒀다. 나는 억압된 감정을 소모하며 점차 시들어갔다. 사랑해도 다른 성향과 소통의 문제로 힘이 들었다. 맛있는 거 먹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장난치고 투닥거릴 땐 종일 웃기만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린 맞출 필요없이 잘 맞는 사이었는데.







그는 매 순간 책임감과 불안감이 억누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하며 세상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기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안 좋은 일을 겪으며 그는 혼자 있으려 했고 나는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를 존중했다. 동굴로 들어가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그가 나에게 손 내밀며 다시 잘해보자고 했을 땐 적어도 어떤 생각이든 계획이든 노력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계획이나 일상에 전부 내가 없다고 느꼈다. 많은 과정 속에 고민하며 지쳤다. 다신 그럴 일 없을 거라던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력하고 억지로라도 관계를 이어가고 표현했지만 반복될수록 나를 갉아먹었다. 그가 방황하는 동안 내 마음의 문은 점차 닫혀갔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너의 마음을 알고 싶어. 계속 연락할 생각 없으니 그만 도망가도 돼. 내가 너에게 모든 걸 맞춰줄 수는 없어. 먼저 끝내주길 바라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맞니? 응당 침묵만이 해결은 아니니까 생각하고 연락 줘.


우리 사이가 해결이 안 되고 여전히 마음이 안 열린다면 잡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야 한다면 난 그렇게 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많은 순간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을까?


[너는 혼자선 불안하고 외로워도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이렇게 두려워하니까 이제 너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게.]


나는 결국 그에게 모진 모습을 보였다. 사랑을 말하던 입술로 이별의 말을 내뱉었다.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거리를 걸으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건데. 나는 이 사실이 너무 슬퍼. 어떻게 죽었다고 말할 수가 있어? 그냥 내가 너 갖고 논 거라고 생각해!]


몇 달 전, 그가 술에 취해 털어놓았던 속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고 침묵했다. 그는 내가 그의 개인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한숨만 푹 쉬었다. 나는 왜 그 순간 침묵했을까. 여전히 미안함에 후회한다.


그랬구나. 괜찮아?

혼자서 견뎌내느라 힘들었겠다.

너의 힘듦을 헤아리지 못했어.


그를 떠올리던 수많은 날들 동안 생각한 말들인데 왜 그 순간엔 이런 말들조차 하지 못 했을까. '사랑해, 좋아해.'라는 말들도 머뭇거리다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고 많은 순간을 놓쳐버렸다. 이후 그는 한 번씩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렇게 한 달 가까이를 흘려보낸 뒤 메시지를 보냈다.


너의 상황은 너의 잘못이 아니고, 너의 가치가 변하지 않으니 자책하지 않았으면 해. 힘든 시간이었을 거고 아픔이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아지길 바랄게.


나는 그가 하루를 마음 편히 보내고 걱정 없이 잠들길 바랐다. 내가 그와 관계를 끝낸 건 그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 한다고 느껴서였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관계를 멈추는 것뿐이었다.







그는 부산에 새로 오픈하는 한의원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에 가면 나와의 거리는 더 멀어지겠지만 부산 바다를 보며 데이트하자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둘 사이에 끝을 말한 후에도 한 달 이상 연락이 끊긴 적 없었다. 누군가 부재중 전화를 남기거나 메시지를 보내거나 몇 마디 오가는 통화를 했다.


그가 떠오를 때마다 일상에 집중했다. 매일 운동하고 해외와 국내 여행을 가고 책을 읽으며 이전의 내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털어내며 다행스럽게도 한동안은 힘들지 않았다. 많이 정리했다고 여겼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꿈에 나왔다. 어느 날은 캠프에서 만난 셋이 성장한 모습으로 마주했고 어느 날은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걱정의 메시지를 남겼다. 어느 날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일상에 집중하면 꿈에 나와 그리움에 마음이 요동쳤다. 그럴수록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연락을 꾹 참고 피했다. 어느 날은 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연달아 8통이나 찍혀 있었다. 너도 나처럼 고민이 많구나. 이후 2주 정도 지난 시점에, 늦은 시각 그로부터 전화가 왔고 우리는 새벽까지 통화를 이어갔다.


[여기 와서 느끼는 건데 누나만큼 좋은 여자가 없어. 누나는 예쁘고 싹싹하고 생활력도 좋고 장점이 많지. 난 좋아하면 표현도 많이 하고 잘해줄 수 있어.]

[나한테는 왜 표현을 아꼈어?]

[그땐 힘들어서. 이제 누나가 나를 그렇게 만들면 되지. 그러니까 우리 다시 만나보자. 일단 부산 와서 나랑 이야기해. 나 보러 올 거지?]


그는 새벽까지 이어진 긴긴 통화를 하다 잠이 들었다. 나는 2주 동안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워지지 않고 감정의 스펙트럼 안에 부유하고 있었다. 노력할 마음은 충분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떠다니는 마음을 모아 서로에게 집중하면 확신이 생길까. 불안정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를 보며 온전히 마음을 열 자신이 없었다. 부산행 KTX와 숙소를 예약하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내일 부산 갈 건데 만날래?]

[부산을 왜 와? 볼 것도 없는데.]

[네가 오라며. 대화하자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괜히 가는 건가.]

[아냐. 와. 퇴근하고 보자. 연락해.]


우리는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이번에도 나 혼자 고민한 걸까. 부산 여행을 취소하려 했지만 숙소가 예약 취소 불가로 돈만 날리게 생겼다. 부산을 가는 목적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를 만나지 않더라도 부산 바다를 보고 와야지라는 마음으로 결국 부산으로 향했다. 바다를 보고 밥을 먹어도 어느 하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의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그를 봐야 할지 고민했다.


"이따가 볼래?"

"그래. 치킨 먹자."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다분했다. 부산 생활은 어떤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힘든 건 없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묻지 못했다. 전날의 대화로 마음이 불편해 얼굴을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어색했다. 치킨만 간단히 먹고 집에 가자더니 그가 좋아하는 술집에 데려갔다.


"너 나 불편하지?"

"응. 불편해."

"나도. 네가 너무 불편해."


우리는 서로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높은 성벽을 쌓아 방어한 채로 속마음은 내놓지 않고 경계만 하느라 대화다운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그는 술에 취했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나를 아프게 했다. 내가 알던 그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나 또한 술에 취했다. 남은 이틀은 제대로 된 부산 여행이 아닌 방황으로 소모했고 KTX 시간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왔다. 그와 있을 땐 행복하고 힘들고 속상하고 상처받고 다시 행복했는데 그가 없을 땐 힘들고 속상하고 아프기만 해서 재회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술을 마시며 나눈 대화와 그의 행동을 보며 그를 만나러 부산에 간 걸 몹시 후회했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만남과 연락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너를 많이 믿고 좋아했는데 왜 그런 말들은 했는지, 난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마음으로 날 불렀는지.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고 관계 정리를 하자고 말했다. 부산에 다녀온 뒤 그를 정리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작은 희망으로 그를 믿어보려 마지막 대화를 요청했다. 내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에 돌아온 건 그의 분노였다.


[누나가 나 좋아한 거? 내가 누나를 더 많이 좋아했을 걸? 근데 누나를 만나면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 내가 힘든데 어떡하라고!]


우리는 엉엉 울며 큰소리를 주고받았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에 담긴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와 만나며 사랑을 하고 상처를 받고 이별하는 과정 속에서 모든 감정에 용기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무척이나 소중했던 그에게 다시 상처받을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