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알려준 삶의 통찰.
"언니의 문제점은..."
나의 친동생이 턱을 괴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귀를 쫑긋했다.
"언니의 문제점은, 좋아하는 게 없다는 거야!"
"엥? 좋아하는 게 없다는 게 왜 문제야?"
"좋아하는 게 없으니까 풀리지 않은 스트레스가 자꾸 쌓이는 거야."
"맞아, 그렇긴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나는 정말이지 교육과 관련된 자기계발하는 것 이외에 뭔가를 소비하면서 멍하니 즐길 줄을 몰랐다. 고작해야 예능 한 두 개 챙겨본다거나 괜찮은 로맨스 드라마가 나오면 몰아보는 게 다였다. 그마저도 본방을 사수하거나 여러 번 돌려보는 정성은 없었다.
딱히 좋아하는 캐릭터도 없고, 좋아하는 색도 없으며, 좋아하는 노래도 없고(선곡조차 귀찮은 나머지 빌보드 차트를 플레잉), 좋아하는 가수도 없어서 뭔가에 푹 빠져 덕질할만한 요소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 젊은 시절 뭔가에 푹 빠져 좋아해 보는 체력과 열정도 금방 소모된다. 그저 남들이 하는 미라클 모닝에 따라 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침대에 누워 휴대폰에서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온갖 기사문, 카페글, 영상들을 훑고 다니다 하루를 마감한다.
"언니, 나 이번에 가고 싶은 카페가 있는데 같이 가줄래?
동생은 내 손을 이끌고 근처 애니메이션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흘러나왔고 벽지가 캐릭터로 장면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매장 구석에는 굿즈를 파는 가판대가 었다. 그리고 그게 다 였다.
"언니가 음료 사줄게. 뭐 마실래?"
동생은 메뉴판에 있는 음료 한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복숭아 주스랑... 아니 근데 여기는 음료 종류가 5개밖에 없어요?"
"네, 손님."
"아... 음... 그럼 복숭아랑 멜론 주스 주세요."
나는 음료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동생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이 음료를 복숭아랑 멜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을 거야. 역시 언니는 일반인스러워."
"그럼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캐릭터 이름을 따서 치사로 주스, 스미래 주스라고 불러."
"아, 그렇구나. 근데 여기 포토 카드도 주더라. 네가 갖고 싶었던 애들의 포토카드야?"
"아니야. 아휴 아쉬워라."
"그럼 내가 바꿔달라고 할게. 기다려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동생이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러지 마. 원래 이렇게 랜덤 뽑기 하는 재미로 받는 거야. 언니는 뭘 몰라!"
나는 동생의 말을 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랜덤 뽑기 하는 재미라... 참 어색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데 익숙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습관은 어른이 될수록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목표 도달 여부에 따라 자신의 행복과 불행이 정해지곤 한다.
동생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인형을 꺼냈다. 집에서 가져온 인형이었다.
"언니, 이것 봐. 귀엽지? 내가 세트로 가져왔어. 사진 찍어야지♡"
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한 구석에는 애니메이션 마니아로 추정되는 남자 두 명이 복숭아 주스, 아니 치사로 주스를 마시며 애니메이션에 한껏 취해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눈짓하며 속삭였다.
"저기 남자 두 명 말이야. 엄청난 팬인가 봐! 딱 봐도 느낌이 와... "
"에이, 저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찐 팬은 뭐랄까, 풍기는 냄새부터 다르다고."
"근데 여기 다 여자 캐릭터들이고 주변에 여자 손님들 밖에 없는데 좀 뻘쭘하겠다."
"뭐 어때?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니고 건전하게 놀고 가는 건데. 언니는 진짜 옛날 사람이야."
생각해보니 나는 옛날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 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좌지우지되는 사람, 남들의 시선에 전전긍긍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내가 받는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 손님은 음료를 다 마시자 자리에서 일어나 캐릭터들과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멀리서 봤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마스크를 살짝 내린 입가에서 미소가 보였다.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나는 동생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사진 찍고 기념하는 게 그렇게 기쁠 일이야?"
"-_- 언니. 그런 말 하지 마. 난 기분이 엄청 좋으니까."
"그래? 그럼 언니가 캐릭터들이랑 예쁘게 사진 찍어줄게."
"진짜? 좋아!"
나는 매장을 한 바퀴 돌면서 동생의 사진을 찍어줬다. 캐릭터와 함께 사진을 찍는 그녀의 표정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여기, 대형 스크린 앞에서도 찍어보자. 하나, 둘, 셋!"
그녀는 영상 속에서 춤추는 캐릭터들과 한 팀이 된 것 같았다. 캐릭터의 춤을 따라 동생도 흥얼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즐거울 일이 적어진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지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이 매일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은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더 심해졌다. 집 밖에 자주 나가지 않으니 더 무기력해졌었다.
그리고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자 더욱더 큰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올해도 이렇게 흐지부지 보낼 순 없다는 마음으로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내 분수에 맞지 않는 목표만 늘어가다 보니 스스로 괴로울 일이 많아졌다.
한참 사진을 찍다 보니 카페엔 우리만 남았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인근 일식집으로 가서 돈가스를 먹었다. 돈가스는 동생의 소울푸드다.
"언니, 언니, 오늘 진짜 최고의 하루야. 카페에서 너무 재밌었고 밥도 냠냠 맛있었어. 꺄앙♡"
동생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손을 흔들며 동생을 배웅했다.
"언니, 또 놀러 올게. 너무 즐거웠어!"
"응, 잘 가. 우리 다음에도 거기 또 가자."
동생을 태운 버스가 출발하려고 부릉부릉거렸다. 나는 창문에 비친 동생의 얼굴을 보고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출발하려는 버스를 쫓아 가 외쳤다.
"다음에는 언니도 덕후 할게! 나도 덕후가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