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항상 그러하듯 궁금하지 않아도 먼 친척들의 근황에 대한 소식을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00이 말이야. 공무원 그만뒀다더라."
"정말요? 왜 그만뒀대요?"
누군가 퇴사를 했다고 한다면 나름의 충분히 고민했을 것이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걸 잘 알지만 나도 모르게 왜 퇴사를 했는지 묻게 된다. 그냥 "아, 그랬구나."하고 넘겼으면 좋았으련만 이 한마디로 인해 부모님과 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 직장과 승진에 대하여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더래. 월급도 가장 적은데 일이 몰리니까 마음이 힘들다고 했다던데, 엄마는 잘 이해가 안 간다. 그 시기만 잘 버티면 월급도 오르고 살만해질 텐데 말이야. 생전 힘든 아르바이트 한번 안 해보고 공시 공부를 하다가 직장 들어가서 일하다 보니 세상살이가 얼마나 험난한지 모르는 거지. 요즘 애들은 그만두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
"저는 그 마음 이해 가는데요. 일이 많아도 공평하게 일이 n등분되는 것보다, 일의 총양이 적어도 한 사람한테 업무를 몰아줄 때 더 스트레스받아요."
"그래도 다 견디면서 하는 거야."
엄마는 내 말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리고 눈빛으로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 그래요 여보?"
엄마의 부름에 안방에 있던 아빠가 거실에 나와 앉았다.
"그렇지. 세상일 중에 쉬운 게 어딨나. 그렇게 참고 일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는 거지. 일머리도 배우게 되는 거고."
"과연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일머리를 배우게 되는 걸까요? 그래서 일 잘하면 손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강약약강 세계는 정말 싫어요."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면 얼마나 좋니. 사람이 싹싹하게 직장에서 잘 적응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야 승진도 하는 거고."
"승진이요? 승진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왜 굳이 승진을 해야 한다는 내 말이 평생직장 내 승진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아빠에겐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응? 승진을 안 해? 왜 안 해? 해야지. 승진 못한 채로 늙으면 나중에 얼마나 초라한데."
나는 아빠의 말에 반항심이 샘솟았다.
"아무리 승진해야 한다고 말해도 싫은데요. 적게 벌고 적게 일해도 행복해요. 하고 싶은 거 할래요."
아빠와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돌았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승진을 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겠죠. 근데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아빠 시대에는 열심히 직장을 다니면 집도 사고 직장 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승진을 해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성격도 못돼요."
2) 이직에 대하여
이때 엄마가 끼어들어 대화를 중재시켰다.
"에휴. 요즘 애들은 다 이런다네요, 여보. 세상이 변했다죠."
나도 날 섰던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얘기했다.
"그나저나, 00이는 이제 어디로 이직한대요?"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며 얘기했다.
"딱히 정해놓은 데가 없나 봐. 공무원만큼 안정적인 직장이 어딨다고 그만두나. 이제 결혼할 나이도 다 됐는데 말이야."
"결혼이야 뭐.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안 해도 되는 거고."
내 말에 이번에는 엄마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미혼인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엄마는 '결혼은 선택이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혼은 언젠가 꼭 해야 하는 숙제였다. 나는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00이는 나름 공시 공부도 열심히 했었고 뭘 해도 잘할 애잖아요. 믿어줘야죠. 그리고 요즘 세상에 안정적인 직장이란 게 있기나 한가요. 안정적인 직장에 있어도 다양한 수입 파이프 라인을 여러 개씩 뚫어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평생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너무 불행해요. 요즘에는 도전해 볼만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니야, 다 불안정해."
아빠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엄마가 안방에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뭐해? 같이 과일 먹지 그래."
엄마는 내 표정을 살피며 침대 위에 앉았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도 직장 다닐 때 힘들었겠죠?"
"말도 마라. 아빠도 만날 그만둔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얘기하던 사람이야. 승진에 누락될 때마다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몰라. 남들은 다 뒷돈 주면서 로비할 때 아빠는 무일푼이었으니... 버티느라 힘들었지."
나는 안방에 걸린 모범공무원 표창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는 어떻게 대통령상까지 받았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대단해요. 명예퇴직 안 하고 정년까지 버틴 것도 신기하고... 엄마, 저는 아빠처럼 할 수 있을까요? 난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아빠를 옛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래에 다가올 모든 어려움들을 아빠처럼 다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럼, 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나를 토닥였다.
3) 고마워요, 아빠.
이튿날 밤 나는 세탁실 문에 넘어져 발이 문틈에 쾅 끼고 말았다.
"아악! 내 발가락!"
오밤중에 아빠는 나를 데리고 문 연 정형외과를 찾아 헤맸다. 연휴 전날이라 문연 정형외과가 없을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자정까지 문 연 병원이 있었다. 나는 아빠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엑스레이를 찍었다.
"다행히 발 뼈가 부러지진 않았네요."
나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아빠가 말했다.
"혹시 진단서를 뗄 수 있나요? 이거 병가를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빠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빠, 이 정도로 병가 내는 사람이 어딨어요. 당연히 출근해야죠."
"그, 그런가? 알았어."
나는 아빠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빠에게 말했다.
"별일이네, 아빠가 그런 말씀을 다하고요."
"무슨 말?"
"아프면 병가 내라는 말이요. 아빠 본인은 직장 다닐 때 승진에 영향이 있을까 봐 병가 한번 안 냈었잖아요."
아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지. 근데 뭐, 아프면 내야지. 요즘엔 옛날하고는 다르잖아. 안 그래?"
나는 아빠에게 고마워서 씽긋 웃었다.
"고마워요, 아빠."
4) 도와드릴게요, 아빠.
집에 돌아온 나는 아빠 데스크톱에 원격 프로그램을 깔았다. 아빠는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에도 컴퓨터를 다룰 줄 몰랐다. 혼자 낑낑대다가 결국 직접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찾아가곤 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아랫 직원을 대하듯 일을 시키곤 했다. 그 모습이 직장 상사의 모습과 겹쳐져 아빠에게 짜증을 많이 내곤 했다. 왜 50대가 넘어가면 컴퓨터 작업을 다 젊은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거냐고 분노하면서 말이다.
"아빠, 집에 원격 데스크톱 깔아드릴 테니까 뭐 하다가 안 되는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세요. 원격으로 도와드릴게요. 알았죠?"
아빠도 나름 컴퓨터가 스트레스였나 보다. 아빠는 내 말에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응, 그래. 고마워 딸."
"네. 도와드릴게요, 아빠."
내가 아빠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땐 지금보다 더 아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