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깔 있는 아내와 무던한 남편
남편은 평소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하곤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좋고 나쁜 건 확실하게 따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자동차 극장에서 앞차가 우리 차를 뒤로 박은 적이 있었다. 서로 뽀뽀를 하다가 차가 후진하는 줄도 모르고 우리 차 범퍼를 쿵 박은 것이었다. 그때 남편은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 용서를 비는 앞차 커플에게 허허 웃으며 다치지 않았고 오래된 차라 좀 긁혀도 괜찮다며 돌려보냈고, 나는 범퍼 스크래치를 보며 속으로 부글부글했다. 그때가 한창 예의 차려가며 연애했을 때니 망정이지 결혼 후였다면 두 손 걷어붙이고 원상 복구해놓으라고 말했을 거다
나는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아하게 '호호~ 전 괜찮아요.'라고 말하다간 험난한 사회생활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누군가 선 넘는 질문을 하면 정색을 했고 가족 사이에서도 상처가 되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집으로 갔다.
게다가 나는 예민하기까지 했다. 미각, 후각, 촉각, 청각 다 예민한 편이라 '저기요, 죄송한데 저는 좀 불편하네요.'라고 대놓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힘들어서 끙끙대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남편은 모든 면에서 무던한 편이었다. 식당에서 시킨 음식에서 고기 누린내가 나도, 옷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도, 옆에서 시끌시끌 떠들어도, 갑갑한 N95 마스크를 써도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기면 성깔을 드러내는 사람은 주로 나였고 옆에서 어찌할 줄 몰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2. 남편의 생존전략 '귀여운 00이'
예민하고 성깔 있는 아내 옆에서 남편은 나름의 생존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귀여운 00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실수로 방귀를 뀌어도 "귀여운 00이 방귀 냄새는 향수야."라고 답했고, 전봉준 머리를 한 채 잠옷을 입고 있어도 "00 이는 귀여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건 맥락에 맞지 않는 '귀여운 00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부터였다.
"오빠, 나 살쪘어. 요즘에 좀 많이 먹었더니..."
"괜찮아 귀여운 00이니까."
"아니야, 이것 봐. 내일 뭐 입지? 예전에 입던 건 꽉 껴서 안 들어갈 듯."
"뭘 입든 00 이는 귀여워."
"에휴, 그나저나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데 예쁜 옷도 못 입고 속상해. 출근하기 싫다."
"00 이는 귀여워."
"뭐래. 나 출근하기 싫다니까."
"00 이는 귀여워~"
"????????"
남편은 자동 반사적으로 '00 이는 귀여워' 전략을 써가며 성깔 부리려는 나를 막아냈다. 종종 내가 어떠한 말을 하든 '00 이는 귀여워'로 귀결되곤 했다. 영혼 없는 말은 하지도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남편은 끝까지 이 전략을 고수해왔다. 사실 나도 이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끔 진심으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진짜 못생겼다고 생각이 들 때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매우 우울해질 때가 있는데 '00 이는 귀여워'라는 말을 들으면 한 숟가락이라도 입에 더 들어가더라.
3. 남편의 생존전략 '00이 충전 중'
남편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를 꼭 껴안고 '00이 충전 중'이라고 말한다. 나를 안으면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처럼 힘이 난다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기분이 안 좋다가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좋은 기분이 든다. 남편에게 빽! 하고 잔소리를 하려다가도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서 나를 안고 충전한다는 그를 보면 성깔을 보이려고 길게 내밀었던 손톱이 쏙 하고 사라진다. 우리가 수없이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싸운 적은 없었던 이유는 항상 남편이 먼저 다가와 많이 안아줬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충전하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무선청소기였다. 집안일을 사이에 두고 이래저래 성깔을 부릴 아내를 막기 위해 매일 무선청소기를 충천해서 돌렸다. 내가 전기가 섀 나가는 게 아깝다고 아침마다 코드를 빼놨고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코드를 꽂고 청소기를 충전해서 바닥을 쓸고 닦았다. 가끔 내가 청소를 하겠다고 나서도 남편은 본인이 청소하는 게 더 깨끗하다며 나를 밀치고 혼자 바닥을 닦았다. 신혼 초만 해도 나 혼자 집안일을 거의 다 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덕분에 남편에게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릴 일이 아예 사리지게 되었다.
4. 남편의 생존 전략 '대신 친정에 전화하기'
한 성깔 했던 아내는 친정 가족들과도 냉전을 오갔다. 항상 평화로운 가족환경에서 자랐던 남편은 왜 가족끼리 냉전 상태를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쨌거나 친정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지면 우리 집에도 찬바람이 불었다. 남편은 찬바람이 쌩쌩부는 내 옆에 서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친정에 전화 안 할 거야?"
"응. 아직 화가 안 풀렸어."
"왜에~. 그러지 마. 그럼 내가 대신 장모님한테 전화해도 돼?"
"오빠가 왜."
"장모님은 나를 좋아하시니까 내가 전화하면 기분 좋아하실 것 같아서 내가 대신할래."
"음... 좋아하시간 하겠네."
"그래, 그럼 내가 이따가 저녁에 전화한다~"
"고마워..."
대신 친정에 전화하겠다는 그의 말에 한창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5. 남편의 생존 전략 '쉬어도 돼.'
예민하고 성깔 있는 아내는 직장 내 생활에서도 성깔이 있었다. 남편은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곤 했는데 잔뜩 화가 나있는 나를 달래주는 그의 전략은 '쉬어도 돼'였다. 한 번은 화가 나는 일이 생겨서 '퇴사'를 열심히 검색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트레스받고 힘들면 쉬어. 나 혼자 벌고 서로 아끼면서 생활하면 되지."
물론 남편은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진짜 퇴사를 하거나 힘들다고 휴직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뭔가 큰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오히려 진짜 힘들면 쉬어도 되니까 이번만은 참고 넘어가자고 다짐하게 되더라.
한 성깔 했던 아내는 지금도 성깔이 대단하지만, 남편의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을 따라 온순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