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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Mar 19. 2022

수학교수님 두 분과 병아리 교사가 합숙하면 생기는 일1

  교과서 심의를 위한 합숙을 앞두고 남편이 커다란 캐리어를 양손에 든 나를 보며 말했다.

  "이민 가?"

  "왜? 짐이 너무 과해? 그런데 한번 합숙을 시작하면 밖으로 나올 수 없잖아. 아마 편의점조차 갈 수 없을걸? 그래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가려고."

  교과서 심의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진다. 어떠한 통신기기도, 저장매체도 가져갈 수 없다. 그리고 정해진 합숙 장소 밖으로 나가면 무단이탈 처리되어 심의단에서 제외된다. 아프거나 다치게 되더라도 합숙장에 상주하는 간호사에게 1차적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합숙장에 들어가기 전에 개인 짐을 꼼꼼하게 챙겨서 가져가야 한다.  

  "그렇구나. 근데 합숙 다녀오면 방학이 다 끝나 있겠네.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잖아."

  "아마 그렇겠지. 이번 방학은 아마도 가장 힘든 방학이 될 거야. 그래도 뭐... 방학 때마다 대학원 다녔었잖아. 비슷하겠지. 설마 더 힘들겠어?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후회 안 해."

  합숙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몰랐다, 무시 무시한 스케줄로 피똥 싸게 될 줄.

  "그래, 그럼. 잘 다녀와. 아프지 말고!"

  "응. 잘 다녀올게!"



  나는 짐을 들고 비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캐리어를 손에 든 교수님들과 선생님들이 있었다.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그중에서 내가 가장 어린 병아리 교사인 것 같았다. 나이가 지긋하신 백발의 교수님들도 꽤 있었다. 나는 어린 편에 속하니 체력적으로 뒤쳐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비밀의 장소로 향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버스에 몸을 싣고 도로 표지판을 바라보며 어디쯤 왔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는 입김을 호호 불어 손으로 창문에 낀 성에를 지워가며 창밖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디로 가는 걸까.'

  버스는 PCR 검사를 위해 잠시 병원 앞에 섰다가 다시 비밀의 장소로 향했다. 나는 어느새 멈추지 않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얼마 후, 버스가 멈췄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펴봤다.

  "영락없는 시골이네."

  합숙 장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 김봉두 한편을 찍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낑낑이고 입구로 들어갔다.

  보안을 지키기 위한 경비가 무척 삼엄했다. 나는 통신기기와 저장기기를 소지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짐 수색과 몸수색을 마치고 나서야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안요원은 나에게 이름표, 각종 서류, 일정표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나는 일정표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말도 안 돼!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한다고?"

  나는 눈을 몇 번이나 비벼서 일정표를 다시 봤다. 혹시 내 일정표에만 오타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다른 선생님이 받은 일정표를 흘끔흘끔 확인했다. 일정표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입에 손가락을 구겨 넣고 달달 떨었다.

  '설마 이게 사실은 아니겠지... 그냥 일정표만 이렇게 쓴 거겠지... 일찍 끝내주는 거겠지... 나는 밤 10시면 불 끄고 자야 하는데 사람인데...'

  나는 일정표를 들고 바들바들 떨며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튿날 나는 게으르게 일어나 메인홀로 능그적 능그적 걸어갔다.

  '3분밖에 안 지났네. 뭐, 다른 분들도 5분쯤은 지각하겠지. 근데 왜 복도에 아무도 안보이지? 다들 어디 가셨나...'

  무거운 메인홀의 문을 슬금슬금 열었다. 모든 참가자가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나만 빼고. 나는 쏜살같이 뛰어서 지정된 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단상에 계시던 위원장님께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셨다.

  "자, 이제 모든 위원분들이 착석하신 것 같군요. 그럼 이제..."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이 모임의 빌런은 내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팀원이 누구인지 이름과 얼굴을 확인했다. 한 분은 백발의 S대 수학 교수님이었고, 다른 한분은 검은색 안경을 낀 M대 수학 교수님이셨다. 우리 팀은 그 수학 교수님 두 분과 병아리 교사 한 명(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과의 합숙이 시작됐다.



  

  나는 산더미 같이 쌓인 교과서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국정교과서에서 검정교과서로 바뀌는 바람에 검토해야 할 교과서의 양이 10배는 많아진 것 같았다. 도저히 교과서를 두 손으로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큰 캐리어에 넣어 끌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한 출판사 당 4권을(수학, 수학 익힘, 지도서, CD) 살펴봐야 하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문제에 오류가 있는지만 살펴보는 게 아니라 교육과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지까지 샅샅이 검증해봐야 했다.

  잠시 후 교과서 검증이 시작됐다. 모두들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교과서를 탐독했다. 나도 졸린 눈을 비비며 교과서에 집중했다. 메인홀은 마치 도서관 같았다. 그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S대 교수님과 M대 교수님도 말없이 교과서만 꼼꼼하게 살펴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쯤 흘렀을까.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엉덩이가 아프네. 왜 아무도 안 일어나지. 다들 힘들지도 않은 걸까. 여긴 어디일까.  나는 누구일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당신은 누구?'

  "저기 선생님.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M대 교수님이 멍하니 앉아있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다가 딱 걸린 학생처럼 화들짝 놀라 "네 넵!"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교수님 두 분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서 두 발자국 정도의 여유를 두고 뒤따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식당 음식은 정갈했다. 탁자에는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내 앞엔 수학 교수님 두 분이 나란히 앉으셨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다가 이렇게 물었다.

 "저... 교수님. 저희 설마... 진짜로 밤 10시까지 일하는 건 아니겠죠?"

  나는 아마도 저녁 8시쯤에는 끝날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음... 글쎄요. 검토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요. 10시까지 할 거예요 아마. 자정까지 안 하면 다행이죠."

  M대 교수님이 국자로 빈 그릇에 부대찌개 국물을 퍼담으며 말씀하셨다. S대 교수님도 그 국자를 이어받아 국물을 담으며 말씀하셨다.

 "이따가 오후엔 같이 모여서 분석 결과에 대해 의견을 나눠볼까요?"

  S대 교수님이 나에게 국자를 내밀었다. 나는 깔짝깔짝 국물을 조금 퍼서 담았다. 아침밥도 걸렀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네, 교수님..."

 

  식사 후 나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날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먼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문을 살짝 열었다. 하지만 훅 들어오는 찬바람에 깜짝 놀라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족들이 그립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건어물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내가 오고 싶다고 박박 우겨서 온 거니까 힘을 내야지! 이제 그만 일어나자.'

  사실 이곳에 오기 전 교장선생님께서 가지 말라고 말리시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았었다. 학교는 생각보다 출장에 관대하지 않다. 비록 그게 교육부에서 추진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때 교장선생님 앞에서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오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치고 교장실을 나왔었다.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시계를 보니 벌써 1시 반. 이번에도 늦었다. 나는 허겁지겁 외투를 챙겨 메인홀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찍이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교수님 두 분과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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