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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Mar 25. 2022

수학교수님 두 분과 병아리 교사가 합숙하면 생기는일2

  지난겨울 수학 교과서 심의를 위한 합숙에서 나는 백발의 S대 교수님과 안경을 쓴 M대 교수님 두 분과 한 팀이 되었다. 이 두 분의 수학교수님 사이에 낀 병아리 교사는(나) 앞으로 닥쳐올 험난한 풍파를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이윽고 M대 교수님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씀하셨다. 

  "다이앤 선생님, 이제 검토했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눠볼까요?"

  "네, 교수님. 보고서 드릴게요."

  나는 자신 있게 출력한 보고서를 교수님께 내밀었다. 비록 빡빡한 일정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보고서만큼은 정성 들여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하던 참이었다. 교과서의 계산 오류 및 오타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 잡아 내겠다는 심산으로 매의 눈으로 검토를 한 덕분이었다.  

  "꼼꼼하게 작성해주셨네요. 제 것도 드리죠." 

  교수님도 본인이 작성한 보고서를 나에게 건네주셨다. 생각보다 보고서의 길이가 짧았다. 

 '후훗. 교수님보다 더 길게 쓰다니. 역시 젊은 패기가 최고 아니겠어. 병아리 교사지만 나도 어딘가 쓸모가 있다고.'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교수님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  역시 교수님은 다르구나."

  교수님의 보고서에는 각, 각도, 변, 선분 등 수학적 용어의 정의 숨어있는 오류를 잡아내셨다. 내가 자잘한 계산 오류 찾기와 교육과정 반영 여부 확인에 치중하고 있을 때 교수님께서는 제일 중요한 핵심을 보고 계셨던 거였다. 나의 긴 보고서가 변변찮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교, 교수님 제가 너무 자잘하게 쓴 것 같아요. 좀... 줄일까요?"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이제 그럼 수학익힘책과 CD를 검토해볼까요."

  "네 넵! 교수님."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수학익힘책과 널브러져 있는 CD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해서 잠시 메인 홀에서 빠져나가 안내 데스크 주변을 빙빙 돌며 걸었다. 그래 봤자 사방이 출입제한 구역 표시가 달린 빨간 줄로 막혀있어 5분 안에 끝나는 산책이었다.    



  나는 짧은 산책, 아니 방황을 끝내고 자리에 앉아 다시 검토작업을 시작했다. 엄마 따라 도서관에 온 사춘기 학생처럼 자세를 삐딱하게 하고 앉아 교과서만 뒤적거렸다. 

  검토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7시, 8시, 9시, 10시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가 느리게 느껴졌다. 저녁식사를 할 때쯤에는 멘털이 반쯤 나가서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봤다. 반면에 내 옆에 앉은 교수님 두 분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밑줄까지 긋는 열정을 보이셨다. S대 교수님은 허리가 아프신지 이따금씩 일어나 허리와 어깨를 돌리셨고 M대 교수님도 피곤하신지 눈을 비벼가며 끊임없이 커피를 들이 켰다. 그 와중에 교수님의 눈은 교과서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진즉 조기퇴근은 포기한 채 밤 10시에는 퇴근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계를 보며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9시 58분. 59분. 59분 30초. 59분 20초. 59분 10초. 땡.'

  그러나 10시가 되었건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엉덩이가 붕붕 공중 부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고민을 하다가 MZ세대 젊은이답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10시 다됐는데..." 

  교과서에 집중하고 계시던 교수님 두 분은 그제야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킨 시곗바늘을 확인하셨다. 

  "그럼 저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교수님."

  "벌써 10시군요. 고생하셨어요. 내일 봬요."

  나는 꾸벅 인사하고 후다다닥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입고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폭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가족이 그리울 새도 없었다. 지금 자야 내일 아침에 지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튿날 나는 아침밥도 건너뛴 채 메인 홀로 총총 걸어갔다. 역시나 전원이 정시에 맞춰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M대 교수님과 S대 교수님은 아침밥까지 드시고 오신 모양이었다.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매일 하루 일과는 항상 비슷했다. 검토와 회의 그리고 보고서 작성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교과서 하나를 검토하다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면 혹시 다른 교과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었는지 확인하느라 전체 교과서를 쥐 잡듯이 잡았다. 마치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듯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봤다. 이러다가 교과서를 외우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교과서를 쳐다보면 적어도 자기 전에는 교과서가 꼴도 보고 싫을 것 같은데 교수님들은 숙소까지 교과서 한아름 끌어안고 가셨다.  다른 팀 교수님은 뒤늦게 오류를 발견해서 전체 교과서를 다시 돌려보느라 밤을 새웠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다들 멀쩡해 보였다, 나만 빼고. 

  나는 운동 부족으로 인한 소화 불량, 수면 부족, 스트레스 성 변비 등에 시달리며 얼른 합숙이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비록 가장 젊었지만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보다 체력이 약한 게 분명했다. 나는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양에 집중하겠다고 두 번 세 번 다짐했다. 그리고 괜히 억지 부려가며 합숙 출장은 절대 오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좀비 같은 얼굴로 보고서를 쓰다가 의자에 기대어 넋이 나가 있던 찰나 M대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녁 식사시간이네요. 같이 가시죠."

  "아. 네 넵!"

  나는 적당한 거리 지키며 두 분의 교수님 뒤를 따라 식당으로 걸어갔다. 벌써 일주일이 넘게 지났건만 아직도 교수님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저녁 메뉴는 해물탕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눈알을 뱅글뱅글 굴리며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가 되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해요?"

백발의 S대 교수님은 팔팔 끓는 해물탕을 국자로 휘저으며 말씀하셨다.

  "저의 경우에는 물리학으로 석사를 받고 수학으로 박사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나들보다 더 많이 고생을 했어요. 막판에는 종이에 수학 문제를 너무 많이 풀어서 손가락, 손목이 아파서 움직이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밥은 먹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왼손으로 식사하기 시작했죠."

  "아... 그렇구나. 역시 아무나 교수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나는 그제야 뒤늦게 S대 교수님이 왼손으로 식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그저 건강하시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화제를 돌려 M대 교수님께 물었다.

  "어제 잠은 잘 주무셨어요? 저는 잠자리 바뀌어서 그런가 아직도 많이 뒤척여요."

  "저도 낯선 데서는 잠을 잘 못 자는 스타일이라 계속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계속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네요. 마시고 나면 또 잘 못 자게 될걸 알면서도 말이죠."

  나는 며칠 내내 잠을 자지 못했다는 M대 교수님의 말에 살짝 놀랐다. 교과서를 들여다보는 교수님의 눈빛에서 피곤한 기색을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들고 지치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다만 다들 티 내지 않으실 뿐이었다.    

  "잠을 못 주무셨다니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예전에도 합숙할 때도 그랬어요."

  "이렇게 일정이 빡빡하고 힘든데...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또 합숙에 참여하신 거예요?"

  "창의재단에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할까 말까 고민을 좀 했는데... 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뿌듯하니까 또 하게 되네요."

  "아..."

  나는 해물탕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생각했다. 

 '하... 뿌듯이고 뭐고 나는 다음에 참여하지 말아야지.'   

 


  며칠 후 합숙 종료일이 되었다. 마지막 날 전까지도 밤 10시가 넘도록 검토작업이 진행됐었다. 점심쯤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다들 녹초가 되어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두 교수님께 후다닥 인사를 드리고 점심 식사도 거른 채 가장 빨리 오는 첫 번째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M대 교수님과 S대 교수님이 다가오셨다.

  "엇, 교수님! 식사하러 가신 거 아니었어요?"

  "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순간 교수님의 말씀에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니에요, 교수님. 교수님 정말 감사했어요."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셔틀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결국 S대 교수님은 나와 얘기를 하다가 점심식사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 짧은 사이에 정이 들었나 보다. 결국 우리는 같은 셔틀버스에 나란히 앉아 종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물론 그 수다는 친구와 나누는 가벼운 수다가 아닌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았지만...)


  잠시 후 종착지에 도착한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개월의 시간이 흘러 우리가 검토했던 교과서가 세상에 나왔다. 교수님께서 말했던 '뿌듯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하지 못하고 뺀질댔던 내 모습이 후회스러웠다. 그때 교수님께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하셨는지, 힘들어도 힘들어 보이지 않으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다음에는 진짜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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