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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Apr 23. 2022

승진하지 못할 운명

도레미파솔 솔파미레도


  따뜻한 봄꽃 향기가 날리는 주말, 나는 남편과 손을 잡고 집 주변 공원으로 산책에 나섰다.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너~무 좋다. 이렇게 손잡고 마음껏 산책도 하고 말이야."

  나는 신이 나서 집주인과의 산책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사실 나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건강이 좋지 않아 주말엔 무조건 집에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향긋한 벚꽃 향기가 더욱 반가웠다.


  우리는 공원으로 향하는 동안 꼭 잡은 손을 흔들며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모든 주말부부가 다 그러하듯 오랜만에 만나면 미주알고주알 힘들었던 직장생활 하소연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 교감선생님은 정말 너무해. 동료 선생님께서 아파서 병가 들어가신다고 하니까 그게 병가 들어갈 일이냐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 아니냐고 했다는 거야. 듣는 내가 다 화가 나더라니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

  나는 한껏 감정을 실어 남편에게 말했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병가 들어가는 선생님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어서 그때마다 빈자리를 채워 넣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픈걸 꾹 참고 근무하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얼른 내 말이 맞다고 동조해줘!' 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남편은 내 눈빛을 보지 못한 채  머리끝에 닿은 벚꽃가지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런 말도 못 하면 관리자가 아니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남편은 꽤나 덤덤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조직 시스템 유지가 어려워지잖아. 원래 관리자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자리라는 걸 이해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하긴 그렇긴 하네. 언젠가 관리자에게 사정사정하면서 쩔쩔매지 않아도 법적으로 보장된 연가나 병가는 당당하게 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러게. 그럴 면 좋겠다."


  

  우리는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천변을 따라 더 걷기로 했다. 이번엔 남편이 하소연할 차례였다.

  "오빠는 요즘 어때?"

  "과장님과의 면담이 더 잦아지고 있어. 마음이 불편하네."

  남편은 주말부부를 청산하고자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부터 사직 의사를 내비쳤었다.  남편은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어 했지만 이미 예약된 환자들을 진료해야 했기에 하반기가 될 때까지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아직까지도 적당한 후임자를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 끝까지 후임자가 없으면 나머지 동료 교수님들께서 남편 몫의 일을 나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수시로 면담하면 오빠도 힘들겠네. 과장님은 왜 그러실까. 관리자가 되면 다들 그렇게 되는 걸까. 그런 걸 보면 난 정말 평생 이렇게 평교사로 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한 때는 교감, 교장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나름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을 했던 짬밥이 어딜 가진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무릇 관리자는 부탁을 잘하거나, 일을 잘 시키거나,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기량이 있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다. 물론 아래 직원에게 일을 부탁을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발로 뛰는 좋은 관리자도 많다. 그러려면 평직 원보다 더 바쁘고 치열하게 일해야 할 거다. 나는 좋은 관리자든, 나쁜 관리자든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쪽에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남편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인지 남편은 직책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의사에게 무슨 직책이 있겠느냐 싶겠지만 나름 대학병원 안에서는 직책과 서열이 뚜렷이 존재하는 듯했다. 또한 학술발표를 하는 연구회에서 어떤 보직을 맡느냐에 따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는 것 같았다.)

  "오빠, 우리는 둘 다 관리자가 될 상은 아닌 것 같아, 그렇지?"

  "그렇지. 우린 아니지."

  "아니라서 다행이다."

  

  벚꽃이 바람에 날려 아름답게 떨어졌다. 마치 하얀 눈꽃이 펑펑 쏟아지는 것 같았다. 벚꽃이 남편의 머리와 어깨 위에 떨어졌다. 나는 입김을 "후~" 불어서 벚꽃을 떨어뜨렸다. 남편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보직을 얻는 것보다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야. 대학원을 다시 다닐까 생각 중이야."

  "대학원?"

  "응. 인공지능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쉽지 않네. 의료와 인공지능을 연계시키려면 더 깊게 공부해야 하는데 대학원에 가면 관련 전공자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남편은 내가 반대할까 싶어 조심스레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치킨 사 먹는 돈은 아까워도 공부하는데 들이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으면 해! 언제든. 후회하지 않게 말이야."

  "알았어. 고마워."

  우리는 꼭 잡은 손을 더욱 크게 흔들며 걸었다.

  "근데 오빠는 학자가 되었어야 했어. 대학병원 교수도 학자이긴 하지만... 뭐랄까... 진짜 학자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의학도 좋아."

  "그럼 오빠가 공부하는 동안 나도 뭔가를 공부해야겠다."

  "무슨 공부?"

  "어떻게 하면 더 귀여워지는지 공부해야지~~~!"

  "에이, 뭐야. 그런 거라면 공부 다 했네. 공부 끝."

  "히히히히히"

  남편은 히히 웃는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천변 끝에 도달했다. 남편은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나는 기분 좋게 우리 둘이 자주 쓰는 구호를 외쳤다.

  "예쏠! 칫솔! 마데카솔! 파라솔!"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도레미파솔 솔 파미레도!"

  나는 내가 알려준 구호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외쳐주는 남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벚꽃향이 마음까지  묻어나는 즐거운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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