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의 대답을 듣자마자 번개 같이 빠르게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우아하게 모닝티를 즐기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추석에 여행이라니! 여행이라니!'
모든 예약이 끝났다. 돌이키려고 해도 취소 수수료가 너무 커서 되돌리기 어렵다. 나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밤새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 날이었다.
명절이 가까워졌다. 나는 불안에 떠는 눈빛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오빠, 지금쯤 시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
"음... 지금은 너무 이르고 다음 주쯤에 말씀드리자."
우리는 시부모님께 비밀을 털어놓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계속 뒤로 미루기만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혹, 혹시 화내시면 어쩌지?"
"에이, 아냐. 우리 부모님은 안 그러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은 안 그려서'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아마 TV 예능에서 남편이 고부갈등에 괴로워하는 아내를 향해 던졌던 말인 것 같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그건 오빠 생각이고."
나는 식탁에 앉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명절에 여행을 가는 며느리를 보며 손가락질할 시부모님과 시누이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 '
개학식 날 방학 숙제를 하나도 안 한 학생이 불안에 떠는 것 마냥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 진동이 식탁을 들썩들썩거리게 할 정도였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던 남편은 '오잉?' 하는 얼굴로 식탁이 왜 붕붕거리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어떡하지.'
남편은 믿을 거리가 못된다.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이튿날 나는 침대에 뒹굴고 있던 남편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오빠, 시누이들한테 전화 좀 해. 우리 여행 가서 명절에 못 간다고 알려드려야지."
남편은 몸을 떼구르르르 굴면서 창살 같은 내 손가락을 피했다.
"응~ 나중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전화해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시부모님께 혼나지 않을지 여쭤보란 말이야."
남편은 그제야 '아하!' 하는 표정을 짓고 시누이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공부만 잘하면 뭐하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첫째 시누이가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시누이와 간단한 안부인사를 주고받은 후 이렇게 물었다.
"누나, 사실 우리 추석 때 여행 가기로 했는데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나는 남편 옆에 바싹 붙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예상외로 시누이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명절 전에 미리 방문해서 사람 없는 곳으로 안전하게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면 되지~ 너무 좋겠다! 잘 다녀와. 가끔 여행 사진도 보내줘."
나는 숨죽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도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남편은 곧이어 다른 시누이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걱정했던 것 과 달리 재밌게 잘 다녀오라는 말씀뿐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큰 산 하나는 넘었네."
"그러게."
시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날, 나는 분주하게 가방을 챙겼다. 가방 안에는 시부모님께 드릴 용돈과 편지 그리고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넣었다. 나는 신나게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편지 써야지."
우리 부부는 항상 용돈 봉투에 손편지를 넣는다. 결혼 직후부터 쭉 그랬다. 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편지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남편은 헤드셋을 쓰고 내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나는 편지지와 봉투를 내밀며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편! 지! 쓰! 라! 고!"
남편은 꽥꽥 지르는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헤드셋을 벗었다. 그리고 만사가 귀찮다는 듯 몸을 뉘며 말했다.
"이번에는 편지 쓰지 말자. 조카들한테까지 쓰려면 힘들어."
남편은 편지지와 봉투를 한쪽으로 쓱 밀어 넣었다.
"쳇!"
나는 발을 쿵쿵 구르며 거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내가 아니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편지 문구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예쁜 봉투와 편지는 필수 !
나는 남편에게 타이핑한 문구를 카톡으로 보냈다.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고마워."
남편은 한쪽 구석으로 치웠던 편지지와 봉투를 꺼내 편지를 썼다. 나는 예쁜 봉투에 편지를 담았다.
잠시 후 우리는 짐을 챙겨 시댁으로 갔다. 시어머니께서는 갖가지 과일을 내주시며 우리를 반겨주셨다. 내가 과일칼을 들자 시어머니는 과일칼을 도로 뺏으며 말씀하셨다.
"과일은 내가 깎을게. 좀 앉아서 쉬렴."
내가 몇 번 더 과일칼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시어머니께서는 손을 내저으며 과일칼을 내주지 않으셨다.
"어서 과일 먹어."
시댁에서 과일 하나 깍지 않고 가만히 있는 며느리가 되지 말라고 친정엄마에게 신신당부를 받았건만 시어머니의 강건한 태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포크로 야금야금 과일을 먹었다.
이윽고 고백해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눈썹을 찡끗찡끗 올리며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 남편은 과일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올해는 저희가 여행을 한 번도 못 가서 추석 때 여행 다녀오려고 하는데 괜찮죠? 안전하고 조심히 다녀올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얼음이 된 것처럼 과일 포크를 입에 물고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추석에 간다고?"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런데 그때,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여행은 젊을 때 가야 하는 거야. 잘 다녀와라."
그러자 시아버지께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코로나 조심하고. 돈 아끼지 말고 좋은 숙소로 잡아서 다녀와. "
나는 시부모님의 말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나도 쿨한 시부모님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지경이었다. 나와 남편은 시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마음 편하게 남은 과일을 뚝딱 해치웠다.
"저희 그럼 이제 가볼게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이 용돈 봉투를 드리자 시아버지는 봉투를 도로 건네며 말씀하셨다.
"우린 안 줘도 된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용돈 봉투를 두고 실랑이를 했다. 남편은 봉투 안의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봉투 안에 편지가 있어서 받으셔야 해요."
그러자 시아버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셨다.
"편지? 편지는 받아야지."
나는 시어머니께 조카들의 선물을 대신 전달했다. 시어머니는 가방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셨다.
"조카들 선물까지 챙겼어? 에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남편이 했던 말을 따라 했다.
"선물 안에 편지가 있거든요."
시어머니는 호호 웃으며 말씀하셨다.
"편지? 편지는 받아야지."
떠나는 길, 시부모님은 주차장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해주셨다. 남편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