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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석 May 02. 2019

[가리지날] 홍길동은 왜 세종대왕 시절에 활약했을까요?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가리지날] 홍길동은 왜 세종대왕 시절에 활약했을까요?  
 
여러분의 답장으로 먹고 사는 조홍석입니다.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는

누구일까요?
아... 아신다구요? 맞아요. '홍길동'이죠. ^^
요즘에야 다 ATM 기기나 앱으로 거래를 하지만

예전에는 돈을 찾으려면 은행 창구에 가서

입금증을 써서 내야 했기에 앞에 놓인 샘플을 보고

 따라 썼는데...
대부분 샘플 속 이름이 '홍길동'이었어요.
  

여전히 사랑받는 홍길동...

이처럼 홍길동이 널리 인용된 건 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이고

최초의 한글 소설은 허균의 <홍길동전>이라고 배웠고,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운 조선시대 슈퍼 영웅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첫 애니메이션 <홍길동> (1967년)

우리나라 첫 극장 애니메이션 역시 1967년

신동헌 감독님의 <홍길동>이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건 가리지날이라고 합니다... O.O
실제 저자는 1800년대 후기 어느 이름 모를 저자가

썼을 거라네요.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고 알려지게 된 건

100년도 채 안되었다고 합니다.
최근 이윤석 교수님이 주장해 여러 언론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오해가 이어져 왔을 까요?

이는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던
다카하시 도루 (高橋 亨)교수가 <조선문학 연구

-조선의 소설>이란 기고문에서
 '옛 문헌을 살펴보니 이식 선생의 <택당집>이란 책에

 '허균이 또한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가히 수호지

 급이었다'라고 되어있다니뽄.

 그런데 허균이노 다른 작품이 죄다 한문작품인 걸

 보면 홍길동전 역시 한문 소설이 오리지날이었을뇌피셜`이라고

 쓰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이라지요?
하지만 경성제국대 제자들은 이 내용의 앞부분만

받아들여 당시 알려진 한글소설 홍길동전이
허균이 쓴 것이고 이게 우리나라 첫 한글소설이라고 정의내린 게 지금껏 알려져 왔다고 하네요. OTL
 
허균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닌 이유는

많다고 합니다.
우선, 현재까지 알려진 3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판본 모두에서 허균이 사망한 1618년보다
70여년 뒤인 1692년 숙종실록에 등장한

도적 장길산이 작품에 나오고
숙종때 처음 설치된 대동포 출납 관청인 '선혜청'도 등장하고 있어 시대가 맞지 않습니다.
또한 홍길동이 만들었다는 활빈당(活貧黨)은 실제로

조선 후기 국의 부잣집을 털어가던 도적패들이

즐겨 쓰던 이름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300년 부잣집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잣집은

평소 덕을 쌓아 주민들이 스스로 자경단이 되어

활빈당이 감히 접근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습니다. ^^
게다가 최근 조선 중기 문인 황일호(1588~1641)의 <지소선생문집>에 홍길동의 일생을 그린
한문소설 <노혁전>이 실려있다는 사실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한글소설 홍길동전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전우치전


그 외에도 영정조 시대에 들어서서야 전우치전 같은

유사한 한글 소설이 여럿 나오게 되는데
홍길동전만 200여년 앞서 나온 후 한글 소설이

전혀 없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많이 등장한 것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왜 18세기 후반에 그토록 많은 한글 소설이 등장할까요?
그건 영정조 때에 이르러 상공업이 발달해 전국에

시장이 발달하면서
오가던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세책집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능해 졌다고 합니다.
오호.... 이미 이 시절에 도서 대여점이 존재했군요. ^^
 
이처럼 여러 의문점이 많았음에도 허균이 힌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알려진 데에는
다카하시 도루 교수  제자들의 애국적 연구 태도가

그 원인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일본은 11세기에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라는

장편 소설이 등장하고
중국도 14세기 원말기, 명초기 때에 삼국지, 서유기 등

장편 소설이 다수 등장한 지라
허균이 한글 소설을 썼다고 한다면 주변 국가보다

한참 늦은 우리나라 고유 문자 소설의 출발점을
200여년 앞당길 수 있었으니 여러 의문점이 있음에도 그렇게 주장했을 거라네요. T.T
 
그런데 황일호의 한문 소설이건 후대의 한글소설에

왜 홍길동이란 동일한 인물이 등장할까요?
이는 실제 연산군 시절에 홍길동이란 엄청난 도둑이

실제 존재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한자가 달라요. 소설속 홍길동은 洪吉童인 반면

실제 홍길동은 洪吉同... ^^;
 
실존 홍길동은 전국 단위 도적 떼의 수령으로서

특히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형인 홍일동이 세조 시절 호조참판이란

고위 벼슬에 오르는 등 권세가 출신이었기에
고위직에게 뇌물을 바쳐 잡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조카 딸마저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였으니...
그러나 결국 중종 대에 이르러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붙잡혀 옥사하고, 그를 도와주던 관리들도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흘러 300여년이 지나자

진짜 나쁜 도적이었음에도 영국의 로빈후드 전설처럼
후대에  '연산의 폭정에 대항해 일어난 의로운 도둑'이란

이미지로 각색되고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분신술을 통해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조선판 슈퍼 히어로로 이미지

세탁이 된 것이지요. =.=
 
그런데...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시대적 배경이

좀 이상합니다.
실존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배경은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여겨진 세종 시절

이야기라고 나오는 것이죠...
소설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됴선국 셰둉대왕 즉위 십오년의 흥희문 밧긔

한 재상이 있스되 성은 홍이요 명은 문이니..."
여러분도 그게 궁금하셨죠? 나만 그랬나? =.=
 

나는 인자한 군주이니라~허허허


왜 그랬을까요? 취미는 오로지 공부이셨고,

어리석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4군 6진을 개척하시어 국토를 넓히셨기에

군사적 업적이 출중한 임금에게 붙이는

'세종'이라는 시호를 받으시고,
천문지리, 기술, 음악, 농업에도 조예가 밝으시고,

백성을 위해 관료들을 24시간 달달 볶아

과로사 시키시던 세종대왕님을 성군이라 칭송하며

세종로에 동상과 기념관도 지었지만, 조선시대

서민층에겐 우리가 잘 모르는 세종의 흑역사가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OTL
 
세종은 잘 알다시피 유교적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군주가 되고자 무척 노력하신 성군은 맞습니다.
역대 어느 임금도 이 분처럼 다방면에 걸쳐

문화 정치를 실현하신 분이 없지요.
그리고 자녀 생산에서도 열과 성을 다하사

18남 4녀를 낳으시니 이 분야에서도

넘버 원이시기도 하구요... ^^;
하지만 완전 무결해 보이는 세종도 노년에는

수많은 질병 때문에 그러셨는지 한짜증 하시면서
신하들의 간청에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세상 물정과

다른 정책도 여럿 펼치시면서 백성들의 원망을

받으신 분입니다.
뭐 다른 임금님은 더 원망받으셨지만요. OTL
 
그 사례 중 우선 거론해야 할 게

화폐 개혁 실패였습니다.


이미 고려 말기부터 중국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저화(종이돈)을 만들었던 것을 다시 조선 초에

만들어 유통시키나 활성화가 되지 않자

세종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며 화폐유통을

강하게 추진합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쌀을 들고 가 다른 물건과 교환해

오던 사람들이 종이조각에 불과한 지전을 믿지 못해
이용하려 들지 않았지요.

그리하여 어린(어리석은) 백성을 교화시키겠다며

관졸들을 풀어 시장에서 물물교환하던 이들을 적발해
가산을 몰수한 후 벌금을 매기고 곤장을 때리게 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무슨 수로 벌금을 낸단 말입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런 말도 안되는 정책 때문에 어떤 이가  시장에서

 물물교환하다가 적발되어 강제로 수군에 징집되어

 끌려가게 되자 "내 자식들마저 대대로 수군 노예로

살 게 할 순 없다"며 자살해 버리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마저 목을 매고 말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 수군은 군역 중에서도 가장 힘든

보직이었기에 이탈자가 많아지자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대로 강제 차출되는 노역으로 변질되어 일생을

지정된 바닷가 지역에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비록 평민이라고는 하나 유럽 중세의 농노와 다를 바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처우를 받은 수군이 임진왜란때 조선을

구한 장본인이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T.T
 
이처럼 자살하거나 고리대금업자에게 벌금을 빌려

평생 고생하는 이가 속출해 백성들이 원망하지만
세종은 "좋은 정책인데 백성이 이해를 못하는 거니

정착될 때까지 밀어붙여라. 종이 돈을 못 믿는다니

금속으로 만들면 되겠지"라며 동전 <조선통보>를

만들어 사용을 강요하지요.

들어는 봤나? 조선통보...

하지만 고려 말기 상공업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권문세족만 부를 차지한다는 사회 불만을

 이용해 역성혁명에 성공한 왕조가 바로 조선이었으니...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만 중시하고 상공업을 억제해

한양 종로 상전을 제외하곤 지방 시장을 폐쇄했기에

 화폐가 제대로 유통될 리가 없었지요.

이에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이 궁궐에 각종 물품을

조달하던 종로 시전에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되는 등

폭동의 기미가 보이자 화폐 사용 정책은 중단하고

 물물교환을 인정하게 됩니다...
실제 화폐 유통은 숙종대에 가서야 상평통보가

제대로 활용되기 시작했으니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은 이에 못 따라 가는 데에도 이상주의자 세종의 의욕이 너무 앞서신 것이죠.
 
또한 다수의 신하에게도 비판받은 정책은

수령 고소 금지법이었습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비록 유명무실했다고는

하지만 신문고 제도 등 지방 수령의 악행을 고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세종은 '상하의 질서를 바로 잡는 유교적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간청한 허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방 수령의 악행을 고발하지 못하게

막아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됩니다.
세종 당시에도 고려 왕씨 일족은 발견되는 대로

죽이고 있었고, 고려에 대한 향수에 젖은 토호 세력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고발해 쫓아내는 등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기에 불가피한 면이 있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요.
 

조선의 북방 개척...4군 6진

또 다른 큰 실책은 4군 6진 개척 이후

사민(徙民) 정책이었습니다.
세종 15년인 1433년 최윤덕 장군에게 명해

압록강에 4군을 설치하고
같은 해 김종서 장군에게는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만들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토록 했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진족이 떠난 자리에 주민이 들어와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현지 주민들에게 국경 수비를 맡길 수 있는데
춥고 척박한 새 땅으로 가려는 농민이 없던 겁니다... =.=
그래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4군6진 지역으로 이주시키는데,
당시 범죄자는 무조건 북송을 했고 양반들에겐 관직을

 하사하여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관직 감투를 주고,
중인 계급인 향리에겐 관직 진출의 길을 열어 주는 등

당근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이주민 숫자가 모자라자 1437년부터는

평안도, 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서도 국경지대로

이주를 진행시켜 4만 5천여명이 이주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혜택을 준다고 해도 말 그대로 3천리 길을

봇짐과 수레에 짐을 싣고 3달에 걸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걸어가야 했으니 가는 길에 병으로 죽고

얼어 죽은 경우가 수천여명에 이르렀단 기록이

엄연히 조선왕조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많아야 700만명 내외였으니

상당히 많은 백성들이 피해입는 상황이었지요.
이에 신하들이 지나친 처사라고 진언하지만

북방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 세종은

버럭 화를 내며
"그런 하소연에 국가 대계를 양보하란 말이냐"라며

밀어 붙였다네요.
사실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에도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하자, 대노하여 하룻동안

이들을 의금부 감옥에 집어 넣을 정도로

밀어붙였기에 반포가 가능했던 거긴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 중에 권세가와 연이 닿은 집안이거나,

돈을 많이 바치거나, 중국 명나라에 바칠 특산물인

해동청 매를 잡아와 바치는 경우에는

예외로 빼주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하네요... T.T
 
그리고, 시행 당시엔 호평이었지만 나중에 문제가

된 게 금광, 은광 폐쇄 조치였습니다.
명나라에서 매년 조공을 요구했는데 바로 앞에 나온

해동청 말고도 과도하게 금과 은을 요구하자,
아예 금광, 은광을 막아버리고선 중국 사신에게 "원나라때부터 너무 많이 채굴해서 이제 더 이상

없다"고 버틴 것이죠,
그래서 조공 물품을 줄인 것까진 참 잘하셨는데...
문제는 광부들의 생계에 대해선 별다른 보완책이

없었던 겁니다.
고려시대엔 귀족들의 해외무역 루트를 통해

귀금속이 유통되었는데 유교 근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조선에선 민간 무역을 금지시키고  상공업을 억제하는

 바람에 광부들의 마지막 남은 큰 생계수단이
명나라 조공용 귀금속 채굴이었는데 이마저도

막아버린 것이죠.
대신에 왕궁 및 특정 사대부들이 사용할 귀금속만

소량 발굴했으니 왕실에 납품할 수 있던 몇몇 광부를

 제외하고는 먹고 살길이 없어져 광산 채굴 기술과

제련 기술이 퇴보하게 됩니다.
반면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방문할 당시에도 은이 많은

나라 '지팡구'로 알려져 있던 일본은
은 제련법이 낙후되어 순도높은 은을 만들지 못해

중국산에 비해 낮은 가격에 수출하고 있었기에
중국과 조선의 은 제련법을 배우고자 늘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1526년 세계 최대의 은광인 이와미 은산이

발견된 후 1533년 조선인 기술자 2명을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해 최신 은 제련법인 회취법을 전수받아

 순도높은 은을 생산해 중국을 거쳐 유럽에 수출할 수

있게 되지요.
그후 1543년 일본산 은을 직접 구매하러 찾아온

포르투갈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조총 등 서양 무기의 유효성에 눈 뜬 일본은

은 수출 대금으로 대량의 철과 무기 제작 기술을

 수입하고 조총과 총알마저 자체 생산해

역으로 포르투갈에 수출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되자
조선을 넘어 명나라, 인도까지 집어삼키겠단 야심을

품고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기술자를 홀대하고 상공업을 천시한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큰 화근이 된 것이지요.
이야기가 너무 나갔네요.
 
이처럼 세종은 명나라의 지나친 조공 요구에 대해서는

 광산을 막아버리면서 게기셨지만...
정작 본인에게 게긴 백성들에겐 아주 가혹하게

 대응하십니다. =.=
 
그게 무슨 얘기나구요?

구로구 온수동...온천이 안나와요.

서울시 구로구 온수(溫水:따뜻한 물)동은

옛날 이 곳에서 더운 물이 솟아 나와 붙여진 이름인데,
이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종은 할아버지 태조, 아버지 태종과 달리 운동을

즐겨하지 않고 고기를 즐겨 드신 비만 체질이어서
20대 때부터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합병증 등

다양한 질환으로 고생을 했고
당뇨 합병증으로 손발이 건조해지자

자주 온천 여행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1438년 지금의 구로구 온수동에서 온천이 발견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새 온천에서 목욕을 하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임금님 전용 온천으로 지정되면 인근 주민은

모조리 강제 이주해야만 했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향을 지키려는

마을 유지들이 온천이 발견된 곳을 묻어버리곤
'온천을 발견했다는 건 다 헛소문'이라고

부인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에 진노한 세종의 지시로 아전과 주민들을

 고문하지만 끝내 장소를 찾지 못하자
결국 주동자들이 처형되고 마을 주민 전체는

 천민으로 강등당했다고 합니다.
구전이라 과장되었겠지만 실제 세종실록 기록에도

3년에 걸쳐 수 차례 해당 지역을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해당 지역이 강등된 뒤 40년 뒤에야 원 행정구역으로

복원된 걸로 봐선 실제 큰 사달이 난 것은 확실한 것이니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군주라고만 알고 있는

우리들로선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O.O;
 
게다가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나마 자유롭던

고려 시절을 '예의범절이 타락한 시대'라 규정한

세종시대 사대부들은 남존여비, 사농공상이란

유교적 질서 수립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에 여성이 말을 타고 궁궐을 출입하던 풍속을

금지해 가마를 타고 오도록 하고,
외출 시 여성은 얼굴을 가리도록 하며,

일반 백성은 가죽신을 못 신게 하는 등

유교 엘리트들만의 특권을 강화해 나갑니다.
또한 불교 탄압도 가속화 해 고려 시대에는

고을 곳곳에 존재하던 사찰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선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되는데,
태종 6년인 1406년에는 국가 인정 사찰이

242개소로 축소된 데 이어
세종 6년 (1424년)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대 종파 각 18개 사찰씩 36개 사찰만 인정해
그 사찰에 속한 3700여 승려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환속시켜 버립니다. 공자천국 불신지옥...
 
또한 서자 차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미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을 결정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함에 따라
드디어 전 인구 중 50% 이상이 노비로 규정되었고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무과 시험은 치룰 수 있었던
서자의 과거 시험 응시 자체도 불허하게 됩니다.


서자란 개념은 고려시대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때는 처와 첩을 구분하는 개념도 없었고
후처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법으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려를 세운 왕건은 지방 유력 호족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일에 성공했고
이들 개국공신 호족의 딸들과 잇따라 혼인해

정국을 안정화 시켰기에 모든 부인에게 동등한

처우를 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기인 제도를 통해 호족의 자식을 수도 개경으로

 불러모아 일종의 인질로 잡고 늘 견제했기에
유력 귀족들은 어릴 적부터 고향과 개경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본거지엔 본처(향처,鄕妻)를 두고 개경에는

 현지처(경처,京妻)를 두는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두 부인 모두 정실로 인정하고

두 부인의 자식 중 어느 쪽도 홀대할 수 없었던 것이죠,
 
띠리서 고려말 공민왕을 도운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게 된 이성계 역시 본처(신의왕후 한씨)는

고향에 두고 개경 집에는 두번째 부인(신덕왕후 강씨)과

 살림을 차린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첫 부인은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뒤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는 두번째 부인이지만

첫 정식 왕비가 된 신덕왕후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가 첫 부인의 자식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을 두 번 겪게 된 겁니다.
그러니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태종 이방원으로서는
방번, 방석 형제를 첩의 자식, 서자로 규정해

적자인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했고
그의 아들인 세종에 이르러서는 서자에 대한 차별을

법률로 제정한 겁니다.
사실 이 법률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폐지된 것인데

오히려 우리나라는 역행해버린 것이지요.
이후 효종 시절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탈출에 성공한

하멜이 네덜란드로 돌아가 쓴,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시말서... <하멜표류기>에서도 조선은 인구중

절반 이상이 노예인 나라라고 까입니다. =.=
 
그러니 무과 시험이라도 합격해서 출세하려던

천민 출신 어머니를 가진 양반층 서자들로서는
느닷없이 노비로 신분이 떨어져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과거 시험 응모조차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홍길동전 초반부에서 홍길동이

아버지 홍문(a.k.a.홍판서)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며 적서차별 제도를

질타하는 장면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서자 차별에 대한 원망을 나타낸 것이에요...
이들에겐 진짜 오리지날 헬조선이었겠네요. T.T
 
그런데... 당시 상황에 대해 아버지 홍판서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게, 이조판서 정 2품 고위직에 계신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주군인 세종대왕이
막 공표한 실정법을 위반할 순 없는 입장이었거든요...

OTL
 
부연하자면,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도 세종 시절

만든 법률에 따라 어머니가 기생이었기에

본인도 기생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변사또로선 당연히 관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거지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이를 구한 건

통쾌하긴 하나...
변사또가 다른 부정을 저지르진 않았는데

오로지 춘향이가 수청 안든 것에 대해 벌만 준

상황이라면 이몽룡이 어사 출두한 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것이에요... =.=
 
이런 상황에서 비범한 홍길동이 집안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한 본처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하자,
자객을 해친 홍길동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호부호형을 허락받아 앙금을 턴 채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 가출을 하니

그의 나이 불과 11세였다고 합니다...
무서운 초딩이었군요... O.O
 
이처럼 서자 차별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진

 홍길동전을 지은 이름 모를 저자 역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지식인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 역사적 지식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과 시험

응시 기회까지 몽땅 박탈당한 서자 홍길동 이야기를

 만들면서 폭군 연산군 시절 실존 모델이 있음에도

 서자의 아픔을 처음 겪게 된 세종 시대로 배경을

 옮겨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슬퍼요... T.T
 
그러니 위선적인 양반 사대부 중심의 암울한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어  백성들의 희망이 된 홍길동과

활빈당을 타도하기 위해 애를 쓰던 조선 조정이

결국 아버지와 형을 볼모로 잡은 상황이 되자
홍길동은 자수하러 왕 앞에 홀연히 등장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홍길동  "내 아버지와 형을 볼모로 잡다니치사만빵...
               나는야 활빈당 당수.

               대표 당수끼리 정상회담 하자스랴"
세종대왕 "어허, 어디 서자 주제에 맞짱...

                   난임금 넌노비...니처지몰이해?
                   하지만 너의 뜻을 알겠으니 니가 원한

                    병조판서 자리 줄게. 찬성?
홍길동 "일단 인정, 허나 서자는 조선 공무원 시험도

               못 치는 이 오리지날 헬조선에서 나만

               특혜 받으면 뭐함?
               내가 이 나라를 떠나면 임금도 해피,

               울 아빠도 해피, 다들 해피이니

                난 이제 그만 헬조선탈출. 뿅~"
 
이에 홍길동이 구름을 타고 조선을 떠나 새 세상으로

향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고,
이 소설을 읽던 당시 백성들은 헬조선 탈출기를 읽으며

 답답한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 같네요...
 
그런데... 율도국으로 간 홍길동의 이후 행적을 다룬

부분은 각 판본마다 다르긴 한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율도국에 도착해

요괴를 물리치고 제물로 바쳐진 두 아가씨와

결혼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는 거에요...
잠깐, 어이 이봐요. 작가님...
결국 아내 둘 다 정실부인으로 인정해 서자 문제를

해소한 게 홍길동이 원한 새 세상의 결말이란

거에요? =.=
 
이처럼 세종 시절의 유교질서 강화로 인해

홍길동전에서 언급된 퍽퍽해진 세상은

오히려 세조 때에 이르러 잠시 숨통이 트입니다.
엥? 천하의 암군 세조요? O.O

영화 <관상>에서의 세조
최근 복원한 세조 어진 밑그림 채색본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가 수양대군 역을 맡아

표독한 늑대의 얼굴을 보여주었지만
이런 표독한 인상은 가리지날입니다.


최근 공개된 세조의 어진 모사화를 보면

아버지 세종처럼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로

그려져 있어 충격을 주기도 했는데요.
세종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닮았겠지

누굴 닮았겠습니까? ^^
 
비록 조카를 죽이고 왕을 차지한

천하의 악당이라고만 기억되는 세조이지만
정작 본인은 '어린 왕 뒤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대신들의 힘을 없애고 강력한 군주가 다스려야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본인 나름의 유교적 세계관 완성 의지가 있었기에
실제 기록상 행적을 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와 달리

죽을 때까지 조카 단종에 대한 죄책감은

 그다지 없었다고 하지요.
 
세조는 왕이 된 후 모범적인 군주가 되고자

고려 왕조도 하지 못한 성문법 제작을 시작해
결국 아들 대인 성종에 이르러 경국대전을

완성케 하는 기초를 닦았고,
세자가 아니었는지라 수양대군 시절

궁 밖에서 살면서 보았던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려

백성을 위한 개선책을 선보입니다.
아버지 세종이 폐지한 지방 수령 고발권을

부활시켰고,우리 민족에겐 고구려를 침공한

나쁜 황제이지만 중국인들에겐 가장 성군이라

칭송받는 당태종 이세민을 롤 모델로 삼아

지방 행차시 백성들로부터 직접 고충을 듣고

즉결 판결하는 퍼포먼스를 조선 임금 중

처음 선보입니다.
또한 조선이 건국되면서 구악으로 몰려

사대부들에겐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여전히 일반 백성에겐 마음의 위안이 되는

 불교를 되살려 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해

불교가 큰 타격을 입었는데
세조가 대신들의 반대에도 훈민정음으로

불경을 편찬하는 등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자
오대산 문수보살 전설 등이 구전되어 오는 등

불교계와 일반 백성에겐 환영받은 임금이

된 것이지요. 뜻밖이죠?
 
아... 그런데 문수보살 이야기가 뭐냐구요?

 불교계에선 유명한 전승인데...
 
아버지 세종의 체질을 물려받은 세조도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악화되는데
즉위 10년 즈음에 등창으로 고생하다가

신미대사가 권유해 오대산 상원사로

등창 치료차 갔다고 합니다.
상원사에 간 다음날, 세조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동자승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조 "동자스님, 미안한데 등을 좀 밀어주면

           안되겠니난어른?
동자승 "그러시지요난얼라"
두말 않고 동자승이 등을 밀어주자

세조는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세조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보시"
동자승 "대왕께서도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반야"
 
이에 깜짝 놀라 바라보았지만 동자승은 온데간데

없고 그토록 고생하던 등창도 나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수보살도 도통 모르겠다굽쇼? =.=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진 보살(지혜를 가진 구도자)로서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세상의 지혜를 모은 <반야경>을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이전에 이미 열반에 드신 부처이시지만

'나만 해탈할 수 없다'며 석가모니불을 도와
아직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에게  

해탈의 지혜를 전파하기 위해
잠시 보살의 모습으로 현실에 나타나셨다고 하지요.
 
이에 세조는 궁으로 돌아와 문수보살의

은덕을 기리고자 동자승을 그리게 하나
그 어떤 화공도 세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네요.
그렇게 애태우던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그림을 그리겠다고 청하고는
세조가 설명도 하기 전에 그 모습을 똑같이 그려놓고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 동자승 그림을 토대로 조각하게 한 것이

지금의 상원사 문수전에 모셔진 문수동자상이지요..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국보221호


그리고 이 문수전 계단에는 돌로 만든

고양이 석상 두 마리가 있는데

 이 석상에도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상원사 고양이 석상

등창이 나은 다음해 문수전에 동자상을 안치한 뒤

세조가 다시금 상원사를 방문해

예불을 드리고자 했답니다.
그런데 문수전에 오르던 세조 앞에 나타난 고양이가

못 들어가도록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든 세조가 법당 안을

수색케하니 자객이 숨어 있더랍니다.
이에 목숨을 구한 세조는 고양이의 은덕을 기려

묘사를 짓게 하고 매년 고양이를 위한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여전히 불교를 믿던 당시 백성들에겐

세조는 딱딱하고 인간미 없는 유교 군주가 아니라
불심으로 덕을 쌓은 훌륭한 군주로 인정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세조의 반정에 기여해 공신이 된

주변 인물들이 문제적 인간 투성이인데다가
세조가 워낙 '의리의 싸나이'였는지라

이들 공신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니...
결국 고려말 귀족들의 토지 독점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사대부 양반들이
60여년 뒤 결국 동일하게 공신전을 빌미로

고려말 수준으로 토지를 독차지하게 되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여전히 암울했어요...

역시 조선 500년은 헬...
 
하지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14개월만에 사밍해

조카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등극하지만 아버지 

세조보다는 증조부 세종을 더 본받아
유교적 성군을 지향하면서 과거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폐지하는 등 유교적 가치를 강화하고
중종 반정 이후에는 성리학이 더 강화되면서

1510년에는 왕실이 정동에 만든 불교 사찰

흥천사마저 유생들이 불을 질러 없애버리는가 하면,

일부 오만한 사대부는 옆에 기생을 끼고 산에 올라
절에 가서 스님들에게 술과 안주 접대를 강요하는 등

왜곡된 유교문화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처럼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은 민생 경제에

소홀해 지면서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일본에게

국력이 밀리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망각한 채 일본이나 여진족보단

형님 나라라고 큰소리 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당하고도 정신 못차리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으로 가는

 잘못된 첫 단추를 이미 이때부터 꿰고 있던 겁니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 중 대왕이라고 존경 받는 군주가

 몇 없는 가운데에서도 워낙 다양한 업적을 쌓아

후대로부터 최고의 성군이란 칭송을 받는

세종대왕이시기에 그 분의 실정을 언급하는 게

겁나기도 하네요.
하지만 위인들의 일생이란 게 누구나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역사는 여러 관점에서 봐야만

 입체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랍니다.
 
왜 홍길동전이 성군 세종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지

궁금증을 가졌던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답장 잊지 마시구요~
 
참조 : 2018 이윤석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한뼘책방
          2018 이영훈 <세종이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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