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 쓰기

넘의 밭을 탐내지 말 것.

by 글쓰기 하는 토끼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시장을 가려면 둑을 넘어야 했다.

종종 나에게 어른들은 물었다.

"너 어디 사니?"

"둑 넘어요."

하면 다 알아 들었다.


그 길 양 옆에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이름 모를 꽃도 많이 피었다. 작은 개울이 있었고, 점점 올라 갈수록 그 개울은 천으로 변했다. 그 위로 기차가 지나다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가 지나갈 때는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기차가 오기 전 얼른 뛰어 피하던지 그러지 못했다면 귀를 틀어막고 숨도 쉬지 말아야 했다.


난 늘 다니던 길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은 나에게 두려움을 먼저 주었다.

그날은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세 살 터울의 작은 언니와 둑 위를 걷게 되었다. 주변엔 많은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다. 고추며 호박이며 완두콩도 있었다.

주인 없이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난 그것들을 따기 시작했다. 주머니가 불록하게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땄다.

'주인 없이 막 굴러 다니는 건데 뭐 어때'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작은언니의 만류에도 난 정신없이 따는 재미에 들렸다.


그러자 언니도 같이 따기 시작했다. 양손 가득 따 들고 우리는 히죽히죽 웃었다. 바지가 무겁다며 좋아라 하며 집에 갔다.

가는 길에 어른 한 두 명쯤 만난 것 같다. 우리를 보시며 혀를 끌끌 찼다.


집에 와 우리는 엄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칭찬하시길 바랐다.

엄마는 우리를 보시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난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엄마의 그 행동을 보고 하면 안 되는 일이었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바로 시무룩해졌다. 내 기억으로 그 당시 난 8살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우리가 딴 그 채소들은 남의 밭이었고, 엄마는 우리가 딴 채소값을 따로 계산해 주인에게 되돌려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길 가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밭도 없을뿐더러 그런 짓을 자칫 잘못하면 도둑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감옥에 갈 수도 있다.


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흙이 그득한 땅을 가져보지 못했다.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은 사실 없고, 한번 살아 볼까 하는 욕심도 없다. 먼저 관리할 일을 떠올리면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거린다.

나처럼 귀찮아하는 사람이 그리 살았다간 귀신집 되기 딱 알맞다.

하지만 채소는 심어 보고 싶다. 상추도 심어 보고 가지도 키워 보고 싶다.

고기 먹을 때 방금 따온 채소들로 한 상 차려 쌈을 야무지게 싸서 먹어 보고 싶다.


그리고 마당이 있다면 된장, 고추장도 담아 보고 싶다.

장독대가 즐비하게 있고 김장을 하면 땅을 파 김치를 묻어 한겨울 소복이 눈이 오는 날, 양말도 안 신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가, 장독대 뚜껑을 열어 사각사각 살짝 언 김치를 꺼내 먹어 보고 싶다.


이것이 나의 로망이라면 소박하게 그지없는 나의 로망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니들이 추어탕을 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