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비 Jun 16. 2024

한라산 정신

꽤 괜찮은 인생메이트_09


작년 12월, 신혼여행 이후로 줄곧 창고 안에 묵혀두었던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그 캐리어를 가득 채워 우리 부부가 향한 곳은 바로 제주도. 제주에서 3주간의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휴식이 가장 큰 목표인지라 특별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고, 꼭 들러보고 싶은 맛집이나 관광지 몇 개 정도만 파악해 둔 채로 훌쩍 떠났다. 모든 일정이 느슨하고 여유로웠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일정이 딱 하나 있었는데 - 바로 한라산 등반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제대로 된 운동이나 등산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에 임했다. 등산하기 하루 전 날에 등산용품을 대여하면서는 심지어 설레기까지 했다. 등산 초보에 저질 체력 걸음으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여정이 될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등산은 어둑어둑한 오전 6시부터 시작됐다. 물, 컵라면, 간식, 방한용품 등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등에 지고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산길로 발을 내디뎠다. 옅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습한 날씨였지만, 도시 공기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산속 나무들의 숨결이 섞인 공기는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질척 질척한 흙바닥이 하나도 찝찝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산뜻한 기분으로,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산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두 시간, 한참을 올랐지만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상. 걸음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열 걸음에 한 번씩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편의 격려였다. 서두르자고 재촉하지도, 쉬었다 가자고 먼저 멈춰 세우지도 않고 그저 내 걸음에 맞추어 뒤를 받쳐주었던 그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격려. 이런 보살핌 아래 힘을 얻어서 나는 결국 한라산 백록담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정상에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얼마 숨을 돌리지도 못한 것 같은데 하산 알림이 울렸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며 슬슬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이제 올라왔던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구나..!' 그렇게 쫓기듯 내려오는 길은 더 고되게 느껴졌다. 체력이 바닥난 것도 있었지만, 얼마나 긴 시간 많은 걸음을 들여야 끝이 나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체력은 훨씬 좋지만, 그만큼 커다란 짐을 지고 나를 챙기던 남편도 꽤나 힘들었을 텐데, 남편은 한 번도 먼저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여보, 여보는 괜찮아? 힘들지 않아?"라고 물어볼 때에서야 "으응 힘들긴 하지~"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지쳐 있는 상황에서 자꾸 본인까지 힘든 내색을 계속 보이면 내가 더 기운이 빠질까 봐, 묵묵히 그냥 버텨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참을 걸어 한 시간여의 거리가 남았을 무렵, 발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꾸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추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격려하며 한 가지 비법을 알려주었다. "이럴 때는 멈추면 정말 더 못 가게 돼. 천천히라도 괜찮으니까 계속 꾸준히 걸어야 해." 지금처럼 생각이 많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생각을 비우고 한 걸음씩 내딛는데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말로 걷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끝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꾸준히 걷기. 그 비법 덕분에 나는 12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자랑스러운 등정 인증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산행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남편의 보살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숙소까지는 차로 무려 40분.(이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숙소를 가깝게 잡았을 텐데.. 한라산을 우습게 본 내 무모함이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였다.) 남편은 그 거리를 힘든 내색 없이 운전하고, 내가 씻을 동안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먹을 힘도 입맛도 없어서 그냥 자겠다며 거절했는데, 남편은 먹어야만 제대로 회복이 될 거라며 계속해서 권했다. 결국 숟가락을 들게 된 나는 앞서 투정 부렸던 것이 민망할 만큼 맛있게 먹었고, 심지어 그릇을 싹싹 비우기까지 했다. 사실은 배가 아주 고픈 상태였는데, 지친 몸이 그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확실히 몸이 한결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남편은 그 모습을 다 보고 나서야 씻고 잠에 들었다. 이렇게 남편이 끝까지 돌보아준 덕분에, 나도 깊고 단 잠에 푹 빠질 수 있었다.


한라산을 등반하며 얻게 된 교훈들. 까마득한 일을 대할 때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낼 수 있는 비법과, 동반자로서 옆에 있는 이를 살뜰히, 그리고 끝까지 돌보는 성숙한 마음까지.. 나는 그것들을 ‘한라산 정신’이라고 부르며, 삶의 순간순간에 떠올려 힘을 얻고 마음을 다잡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의 지금 다시 꺼내어보게 된 것은, 현재 나와 남편이 겪고 있는 일상에서 이 '한라산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남편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등산을 할 때처럼 크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 마음이 어떨지는 꼭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남편을 보며, 한라산을 등반하던 때의 우리를 떠올렸다. 지금은 그때의 남편의 자리에 내가, 내 자리에 남편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 남편의 고됨이 곧 나의 고됨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힘겨울 남편을 위해서,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그 자리를 이번에는 내가 감당해 보기로 했다. 그때 우리가 함께 해냈던 것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함께 이 시간을 완주해 나갈 것이다. 쉽지 않지만 당장의 하루하루를 잘 내딛을 수 있도록, 나는 그의 한 걸음 뒤에서 꾸준히 격려의 마음을 보내며 보살필 것이다.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끝까지 - 이 힘겨운 시간이 지나 회복과 평안의 밤을 맞이할 때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집안일? 아니, 살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