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 준비를 끝마쳐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오늘. 바로 25년의 동지입니다.
동지는 해가 가장 늦게 뜨진 않아도 해가 가장 짧은 날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태양은 아직도 지평선 아래에서 미적대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지평선 아래에도 따끈한 전기장판일 깔린 모양이지요.
이런 날 전통시장에 가보면 떡집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특히 퇴근길이면 더하죠. 팥죽을 구하지 못한 한 집의 가장들이 모두 모여있을 테니까요. 마치 크리스마스이브 퇴근길의 장난감가게 같달까요? 미리 알았더라면 '본죽'에다 동지팥죽을 예약주문해 두었겠지만, 동지를 미리 알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라면 미리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21세기에 절기를 미리 챙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1차 산업이 더 이상 각광받지 못하고 지구온난화로 날씨마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지금, 동지를 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래도 동지는 그 역사가 깊은 만큼 아직도 동짓날이면 학교와 회사 급식에서 팥죽을 내어주곤 합니다. 동짓날의 깊은 의미보다는 예식만이 별난 놀이처럼 남아있는 셈입니다. 별난 놀이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놓치기 아까운 이벤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올해는 큰맘 먹고 전날부터 팥죽을 끓였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동지를 해가 다시 태어나는 시점으로 보았습니다. 해가 가장 짧은 날이자 그다음부터는 해가 길어지기에 죽음 이후 새롭게 태어나는 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기에 동지는 작은설, 아세 [亞歲]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지금의 12월 31일처럼, 그때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날이 동지였던 것이죠. 그렇기에 새로운 한 해의 무운을 비는 것이 중요했어요.
비슷한 이유에서 그 할망은 애순이에게 팥을 뿌려댔을 겁니다. 팥의 붉은색을 악귀가 싫어하기에, 액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맡겼던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해가 들 때 좋은 일만이 있기를 바라며 동지에는 팥죽을 끓입니다.
올해 사용한 팥은 사실 이미 악귀를 한번 쫓아낸 녀석입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올 때 힘 좀 썼죠. 그런 놈에게 한번 더 액운을 막아달라고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경력직이니 좀 낫지 않겠어요? 팥죽에 담긴 의미보다는 그 맛이 더 중요한 저로서는 뭐 그놈이 그놈입니다.
그보다 그때는 먹을 생각이 없어서였는지, 팥을 대충 고른 탓에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골라내고 나니 그 양이 30%는 줄어든 느낌이에요. 그래도 이 팥알들이 내년의 하루하루라 생각하고, 액운이 낀 날을 골라낸다는 심정으로 못난 낱알을 골라냈습니다.
그러고는 충분히 불린 뒤 한참을 끓이고,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해 적당히 갈아주었습니다. 새알심도 같이 준비했어요.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동지에 맞춰 먹을 생각에 뿌듯함이 앞섰죠.
그리고 저녁에 날아든 비보.
"자기야, 올해는 동지에 팥죽 먹으면 안 된대... 애동지래..."
"뭐?!"
'그럼 내 팥죽은..?'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