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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n 22. 2020

내가 상대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을 때,

늙어 가는 감각

 나의 경우 늙어가는 감각은 마음보다는 몸이 먼저 느꼈다고 믿고 싶다.  


서른 되었을 때에는 멋도 모르는 게(멋도 뭣도 암것도 몰랐다) 노인네 인 양 굴었을 뿐 육체는 쓸만 했는데 마흔 넘어가니까 레벨이 달라졌다. 늙음의 전조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하루 종일 침대 신세를 지는 일이 생긴다. 지난 일기를 들여다보니 이런 문장도 있다. '오늘은 뭘 했다고 아픈 건지 이유나 좀 알고 싶다.' 그게 때로는 몸살이었다가 때로는 배탈이었다가 그렇다. 일이야 반 평생을 쉬지 않고 해 온데다가 최근에 와서는 피고용인이었을 때처럼 하루 12시간 씩 일하는 것도 아닌데 과로때문이라고 하기는 자존심이 상한다. 게다가 운동이라면 중독에 가깝게 하고 있다 (가끔은 그 때문에 아픈가도 싶다). 그런데도 정기적금처럼 꼬박꼬박 드러누워야 하는 걸 보니 늙어서 그런게지. 여하간 예전과 같은 양의 노동을 감당하지 못하는 육신이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늙음의 또 다른 증상 중 하나는, 매일 아침 몸의 컨디션을 예민하게 챙긴다는 점이다. 이건 규칙적으로 드러 눕는 것과 연관이 있다. 몸의 컨디션을 A, B, C로 나눌 때 오늘은 어떤 등급인가 생각한다. A인 날보다 B인 날이 많은가? 아니다. 대게가 B이고 어쩌다 C가 걸린다고 보는게 맞다. 날아갈 것 같은 컨디션의 A는 근래에는 없었다. 30대의 나? 지금 돌이켜보니 대게가 A였고 어쩌다가 B 였다. 아니, 아예 컨디션 등급 같은 거 몰랐다. 필요가 없었다. 간혹 밤을 새며 일을 했고 피곤했지만 그게 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립지는 않다.


노안도 빼놓을 수 없다. 내 휴대폰의 글자 폰트가 너무 큰 것 아니냐면서 직원들이 웃었다. 내 컴퓨터 모니터의 아이콘이 이상하게 큰 것을 본 직원은 내가 어떻게 정렬하는지 몰라 그러는 줄 알고 다시 정렬해 줄까? 묻는다. 문자를 읽는 일이 ‘일’ 이 되었다. 안경들을 죄다 가져가서 렌즈를 다 바꾸었다. 아직 돋보기를 쓰고 있진 않지만 안경점 직원이 다초점 렌즈를 써보지 않겠냐고 권하니 엄마의 울퉁불퉁한 안경이 떠올라 우울해졌다. 젊음이 주는 효능감을 늙어서야만 깨닫게 된다는 건 삶의 아이러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마음도 늙어 가는 건가 싶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하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나. 그나마 마음의 노화를 경계하는 기준을 세워 놓기는 했다. 나름대로 이 기준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상대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으면 마음도 늙은 거다'.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다. 그 때 나 다니던 회사 대표가 직원들 몇 명을 찻집에 앉혀 놓고 네 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설교를 했다(과장이 아니다). 그 네 시간이 서로의 의견을 교류하는 장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실제로는 입가에 하얀 거품이라도 좀 닦으세요 라고 말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품을 참느라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결심했다. 저렇게 늙으면 안되겠구나. 돈 많고 나이 많아져도 저런 흉물은 돼지 말아야지.


그런 예는 넘치고도 넘친다. 가깝게는 내 보모님, 한 다리 건너면 부모님 친구들, 나와 어쩌다 밥먹는 알사장님 부부, 나와 일하면서 인생 선배를 자처했던 수 많은 어른들은 말을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모르는 듯 굴었다. 인정하기 무섭지만 물론 내게서도 그걸 본다. 직원들과 식사 자리에서 신나게 떠들다가 흠칫 하고 입을 다문다. 지금 누가 제일 얘기를 많이 하고 있지?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나라고 생각 되면 마음에 생채기가 난다. 젠장, 이렇게 꼰대가 되어 가는 건가. 나야 원래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다. 문제의 본질은 수다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있는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 하고 있는가?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다.


멘토니 멘티니 하면서 가르치고 조언하기를 권장하던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결국 자기 생긴 모습대로 산다.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저의 멘토세요, 라고 하면 에헴, 하고 한 바탕 늘어 놓는 풍경이 여간 마뜩치 않다. 나는 이제 사람 고쳐서 쓴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냥 껴안고 감내하던가 그 깜냥 안되면 헤어져야 한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업무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야 연차가 해결해 주지만 자기 생긴 천성을 바꾸기는 쉽지가 않다. 다들 자기 경로에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구르다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터득해 가겠지. 내가 여태 내 나름으로 그러고 사는 것처럼. 요는 인생선배 자처하는 일장연설이 대게는 쓸모 없다는 거다.


그래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남들 앞에서 떠들어 대면 입가에 하얀 침이나 닦으라고 할까봐서 여기다가 가명으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글이라는 건 (조지 오웰에 의하면)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위이니까 말이다(이렇게 말해 준 사람 있어 고맙다. 나만 그런 줄 알고 숨기고 살 뻔 했다). 말로 주구장창 떠들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일들이, 글로 써 놓으면 간단해진다. 독자로서는 필요한 것만 골라 읽으면 그만이고 작가로서는 어쨌거나 계속 써대면 그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지만 작가들은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그대로 살아간다.' 조지 오웰은 어떤 면에서는 천재다.


우리 엄마 인생 베프, 박씨 아줌마도 조지 오웰 버금가는 말씀을 남기셨다.  

'왜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냐고 했지? 그게 늙으니까 말이다, 내가 한 말을 자꾸 까 먹어. 꼭 해야 하는 말인데 안 했으면 어쩌나 싶어서. 그러니까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한다. 젊은 네가 듣기에 짜증나겠지만 어쩌냐, 늙어서 그런 걸. 이해해라.'


나이가 드는 걸 느낀다. 나도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렇게 될 게 뻔하다.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을 쓴다. 말로 떠드나 글로 떠드나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 본다는 점에서는 글쓰기가 장점이 크다.


이게 늙어가는 거라면 뭐, 받아 들여야지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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