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월남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망나비 Jul 06. 2020

글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놀랄 일이다.

글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놀랄 일이다. 책을 낸 사람, 낼 사람, 내고 싶은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인다. 죽기 전에 아무 책이라도 내 이름으로 한 권은 반드시 내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코웃음을 치는 분위기여서 구닥다리는 나뿐인 줄 알았더니 이건... 나 정도는 백사장 모래알 중 하나였다.


사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소설이다. 소설가 OOO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조바심치던 때가 있었다. 서른 즈음에는 박완서 님이 잠시 내 조바심을 달래 주었다. 그때는 마흔 살이 오지 않을 것처럼 멀게 느껴져서 박완서 님이 마흔 살에 등단했다는 얘기가 안도를 주었던 탓이다. 시간이 많이 남았구나 했는데 그 사이 마흔도 중반이 되었다. 먹고살기 바빴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사이사이 소설 비슷한 것을 몇 번 써 본 적이 있었는데 꽤나 후지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의기소침해졌고 의욕은 절단 났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내 경우, 완전히 압도되는 소설을 만날 때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하나는 경외감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투심을 갖는 것이다.


신의 경지로 간주되는 넘사벽의 작가들은 부럽지도 않다. 그들은 선계에서 살다가 죽어서 신이 되었다. 대게는 고전이라고 불리는 걸 쓴 사람들이고 그중 대표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안나 카레니나>나 <죄와 벌> 같은 걸 나와 같은 종의 인간이 썼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작가가 자신의 속내를 까발리는 경계가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다 까발리며 피를 흘리느니 저는 차라리 하산하겠습니다, 고 말하는 게 낫다. 절대 저렇게까지 쓰고 싶지 않다. 그런 재능을 주시려거든 그냥 저를 거두소서.


선계는 접고 현계를 둘러보자. 차고 넘치는 소설가들 중 진짜로 부러운 몇 만 추려본다.


내 나이 또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20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린 은혜로 충만이 가득했다. 그때는 사람 보는 시각이 편협해서 하루키 좋아하면 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더랬다(하루키 좋아한다는 말에 속아서 개새끼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십 대, 사십 대가 되어서도 하루키의 신간은 나오기만 하면 읽었다. 매번 베스트셀러인걸 보면 나만 읽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저렇게 간결하고 짧은 문장이라면 나도 어찌 저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을 주는 게 하루키 책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하루키 키드들이 작가가 되었다. 지금은 그 하루키 키드들의 책을 사서 볼 만큼 세월이 흘렀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어 보면 소설가의 삶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에게 있어 그의 에세이 중 최고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나도 하와이 섬에 집을 빌려 몇 달이고 살고 싶다!! )


한 편 눈물 콧물 빼는 영화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냉소로 가득한 예술품을 만날 때 체증이 내려가는 걸 느낀다. 냉소적인 글을 쓰고 싶다, 는 영감에 불을 댕긴 이는 밀란 쿤데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지루한 철학책인 줄 알고 있다가, 늘 소설책을 들고 다니던 대학 친구가 그 책 재밌어, 하는 말에 용기를 내어 읽었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쳤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이런 것이었네. 그런데 이 양반이 벌써 썼고 그마저도 여러 권을 썼네. 울어야만 끝나는 슬픈 역사를 끝내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의 최신작 <무의미의 축제(2014)>가 조소와 냉소가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는 혼자서 만족스러워했다. 스타일은 영원하다. 늙는다고 다 변하는 것은 아니다.  


커트 보니것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소설을 사서 본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극을 이런 골 때리는 설정으로 풀 수 있다니 얼마나 용감한가.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너무 참신해서 컬트적 마니아가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사실 그의 소설보다는 그의 친구이다(이름은 잊어버렸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한 권을 읽으면 다른 것들도 사 모으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중에  <Letters>라는 책이 있었다. 커트 보니것이 남긴 수많은 편지들을 연대기 순으로 모은 것이다. 그가 편지를 나눈 사람들 중 한 친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커트 보니것은 그를 부러워한다. 왜 부러운고 하니 이 친구가 사업에 성공한 자본가인데 심지어 소설까지 잘 팔리는 작가인 것이다. 당시 커트 보니것은 밥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돈도 많은데 글까지 마음껏 쓸 수 있는 친구라니 부러울 수밖에. 역시 무릎을 쳤다. 그럴 수 있다! 글을 쓰겠다고 생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소설가로 성공하려면 다 때려치우고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런 좋은 표본이 있으니 반드시 본받고 볼 일이다.


그리고 김영하 님이 부럽다. 고랫적에 그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서는 내가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이에 그의 다른 작품들은 챙겨 읽지를 못하다가, 몇 해 전에 <오직 두 사람>이라는 단편집을 사서 봤는데.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구나, 잘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고 다시 무릎을 쳤다. 그 간 소설가랍시고 TV에 얼굴을 비추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읽어보고 실망한 적이 꽤 있었더랬었다. 게다가 그즈음에 단편집 출간이 열풍이었는지 신인, 중견 작가들의 단편들도 읽을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도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더랬다. 김영하 님은, 부러워 미치겠다. 질투심 폭발이다. 팬이 되었다.


이 외에도 부러운 작가들이야 많지만 이 만큼 불러오는 데도 오늘치 뇌의 용량을 다 썼다.


내가 부러워하는 작가들은 저렇게 고급진데, 내가 끄적였던 소설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아닌 무언가를 흉내 내는 수준에 그치거나 흉내마저도 완성도가 심하게 떨어졌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명확치 않아서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이야기는 산으로 갔다. 어떤 작가들은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쓴다는데 내게는 죽기 살기의 각오도 없었다. '너 같으면 이거 돈 주고 사서 읽겠니?'라고 자문해보면 언제나 답은 '아니'였다. 그래서 저들이 부럽기는 한데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부러워만 하다가 말 수도 있다. 그러다가 운빨로 질 떨어지는 책 한 권 간신히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 안되면 성공한 자본가가 되어 내 돈으로 내 책 출판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뭘 쓴담.


요는,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은 초지일관 소설가였는데, 내내 딴짓만 해 왔다. 제대로 시도도 해 보지 않았으니 실패,라고 단정하긴 이른 것인지, 죽기 살기로 시도하지 않고 있으니 꿈의 목록에서 지워버려야 하는 것인지. 갑자기 기로에 선 이 느낌은 뭐지?

이 느낌은 최근 브런치에 글을 마구 써대면서 시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기장에 쓰던 걸 여남은 명이라도 독자가 있는 공간으로 옮겨와 쓰다 보니 내 꿈이 글쟁이였다는 걸 새삼 상기하게 된 것이다(고, 고, 고맙습니다). 한 가지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글 쓰는 행위 자체는 기절할 만큼 재미있다는 점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만 즐긴다는 게 과연 희망적인 일인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지만,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언젠가는 결과도 나아지지 않을까, 라며 막 아무렇게나 마무리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한 삶을 위해 집을 짓는다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