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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l 22. 2020

행복한 삶을 위해 집을 짓는다는 사람들

<건축 탐구, 집>을 보면서

  아침도 저녁도 없는 생활이 몇 주째 이어지다 보니 슬슬 피곤이 몰려온다. 직원들도 피곤한지 지난주에는 직원 한 명이 FXXX 섞어가며 성질을 부려 대니 다른 한 명은 질질 울더라. 하루 이틀 서먹하게 지낸 후 화해를 한 모양이다. 다시 샐샐 거리며 웃고 다닌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들도 날카로워진다. 고매한 정신 따위야 언제나 비루한 육체의 지배하에 있다는 걸 이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요즘에는 웬만한 분쟁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한다.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기다리면 어느새 나아져 있다. 어떻든 끝이 보이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나 역시 폭주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열폭하면 분위기 딱 가라앉는다. 좋을 게 없다. 뾰족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서 어제는 일찍 퇴근해 버렸다. 어디 아프냐고 걱정의 말을 건네는 직원들에게는 그냥 아프다고 해 두었다.


그렇게 집에 와서는 빈둥거린다. 오래전에는 멘털을 일로부터 완전히 떼어내기 위해 <무한도전>을 봤었다. 일단 치킨을 한 마리 앞에다 시켜놓고 맥주를 들이키며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재미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야말로 옛날 일이 되었다. 베트남에 와서는 불철주야 <매불쇼>를 들었는데, 그마저도 첫회부터의 정주행이 다 끝나서 요즘에는 EBS의 다큐멘터리로 건너갔다. TV로는 못 보고 Youtube로 챙겨 본다.


그중 홀린 듯이 보게 된 것이 있는데 프로그램 제목이 <건축 탐구, 집>이다. 태블릿을 못 놓고 내내 그걸 들여다보는 나를 남편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집 지을라고?' 집을 지을 생각이 없는데 이런 프로그램에 홀린 게 이상한가? 모르지, 나도 언젠가는 집을 짓게 될지.


너도 나도 부동산에 투자해야겠다는 요즘 같은 때에, 하루가 멀다 하고 부동산 가격이 출렁이는 게 뉴스로 보도되는 이 시대에 과감하게 전재산을 털어 자기 살 집을 짓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나에게 기대치 않은 대리만족을 준다.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집을 지은 일이 자기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게 중에는 살다 보면 곧 후회하게 될 것 같은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내 눈에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거대한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그들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다. 조그만 의자 하나만 만들어도 뿌듯함이 클 텐데 집이라니, 그것도 남은 여생을 가족과 함께 살게 될. 사랑을 받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남이 아닌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도전하고 성취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앉았는 내게는, 완전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보는 것 자체가 나름의 휴식이 되는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나 역시 언젠가 집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나의 부모님은 몇 년 안 남은 은퇴를 앞두고 집을 지을 계획으로 땅을 구매했다. 말만 듣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있다가, 남은 여생을 평안히 보내기 위해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집을 짓는 수많은 노부부들을 모니터 안으로 엿보면서 내 부친과 모친도 저 중의 하나이겠구나 생각이 구체화된다. 내 부모는 어떤 집을 짓게 될까? 어쩌다 들렀을 때 내가 머물 방 같은 것도 고려하고 있으려나? 그 방의 창문으로는 저들의 집처럼 먼산이 보이려나? 채소를 일굴 텃밭 같은 것도 계산해 두었겠지? 그걸 뜯어다 고추장에 싹싹 비벼 비빔밥을 해 먹으면 좋겠구나. 그런 소소한 생각들을 하면서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부모 아닌, 내가 짓는 집은 어떠할지에까지 생각이 이른다. 상상 속의 내 집 창문은 어찌 생겼을지 그 바깥으로 무엇이 보이면 좋을지 주방은 어디에 둘지 내 책장은 어디에 세울지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당면한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일을 상상하는 것도 휴식의 한 부분이겠거니 한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다. 물론 주거공간이라는 주제에 한정된 건축 개론이지만, 건축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지식, 전문가가 가진 지식을 들으면서 전에는 몰랐던 것을 지금은 알게 된다. 한옥을 짓는 사람, 양옥을 짓는 사람, 그 둘을 합한 것을 짓는 사람, 나무집을 짓는 사람, 흙집을 짓는 사람, 콘크리트 집을 짓는 사람. 게 중에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콘셉트의 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지만 당연히 내 맘에 쏙 드는 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다. 내가 집을 지으면 저렇게 하면 좋겠구나 깨알 같은 지식을 모은다. 언제 써먹을는지 보장은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집은 상상 속의 집이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TV 프로그램이다 보니 수많은 케이스 중 잘 지어 놓고 잘 사는 사람들 얘기만 보게 된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일 테다. 집을 지으면 다 저렇게 행복해지나 보다 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그에 대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틀림없이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을 웃음으로 가린 채 사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짓궂게도 출연자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눈언저리 어딘가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지는 않았는지 탐정처럼 살핀다. 눈가의 그늘은 나의 바람이었나. 그들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같은 이유로 행복해 보인다. 그렇담 바쁜 와중의 짬 시간에 행복한 사람들을 염탐하는 게 낙인 나는 지금 불행한 것인가 자문해 본다.


불행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불행이란 불만이 가득한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엉엉 우는 상태이다. 몇 해 전에 잠깐 그런 상태이던 때가 있었다. 힘이 들더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으면 최소한 불행한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다행히 뭐든 내 맘대로 결정하고 산다.


그럼 행복은? 행복은 모르겠다. 운동하고 나서 몸은 기진맥진한데 정신은 구름 걷힌 듯 깨끗할 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읽고 싶은 책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는데 마침 시간까지 있을 때 느끼는 게 행복인가 생각해 보았더니 그건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 혹은 도파민의 농간이다. 그렇대도 어떻든 실질적인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은 거기에 있다. 그걸 굳이 행복의 순간이라고 불러야겠다면 그럴 수 있다.


인생의 원초적인 행복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런 게 있긴 한가? 인생은 어둑한 안개를 걷어가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인생은 대체로 쓰다. 안개가 다 걷히고 모든 게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언젠가 온다면 그때 원초적 행복감이란 걸 느끼게 될까? 그런 게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여하간 행복한 표정으로 달뜬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위로를 준다. 그게 완전한 진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쁨은 화면 속에서 진짜처럼 빛난다. 그렇게 재충전을 하고 다시 응차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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