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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l 27. 2020

다 이룬 일요일



하루 종일 집에 있게 되는 날이 있다. 간혹 일요일에도 오전에 나가서 일을 할 때가 있지만, 오늘은 작심을 하고 쉬었다.  마음 쓰이는 일들이 몇 개 있었다. 큰 일들이 아니고 결국은 해결될 일이라서 쉬는 동안은 저만치 밀어두면 된다. 주말에까지 붙들고 있는다고 별난 수가 생기지는 않는다. 업무 관련한 메시지들이 띠롱거리며 도착했지만 휴식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읽어야 할 책이 있었고, 느긋하게 수영도 하고 싶었다. 밖에서 먹는 음식 말고 집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우기만 하면 되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차도 마시고 싶었다. 커피 말고.


그래서 오늘은 바람을 다 이루었다.


책은 밑줄 그어가며 필요한 만큼 다 읽었다.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발견돼서 모르겠는 건 밑줄을 그었다가 나중에 사전으로 찾아본다. 1944년 미국의 한 도시에 살고 있는 Lily라는 여자애의 이야기이다. 이 아이는 천하의 거짓말쟁이인 데다 하는 짓이 청개구리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한창이고 엔지니어인 아빠는 조국의 승리를 돕기 위해 전장으로 떠났다. 한 명 있던 친구 역시 그 애 아빠가 디트로이트 폭탄 공장에 취직하는 바람에 이사를 가서 Lily는 달랑 혼자 여름을 나게 생겼다. 그때 마침 Albert라는 남자애가 나타난다. 그 애는 헝가리에서 전쟁을 피해 미국까지 왔다고 하는데 Lily의 눈에는 아무래도 나치의 스파이 같다.... 그런 얘기이다. 2차 세계 대전을 다른 소설들은 많다. 배경은 주로 유럽의 어느 도시, 반드시 유대인이 나오고 전쟁 현장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는데 이건 좀 다르다. 뒤늦게 전쟁에 참전해 승전국이 된 미국에 살던 여자애 이야기이다. 그녀는 전쟁을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듣는다. 거기에는 항상 스파이가 나오고 스파이를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온다(참 미국답다). 이 아이가 전쟁을 실제라고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친구가 이사를 가야 할 때, 버터가 부족한 빵집에서 쿠키를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아빠가 전장으로 떠날 때이다. 전쟁은 각자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끼친다. 전쟁뿐이 아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곳은 팬데믹으로 국경이 닫혀있고 그게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어려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전염병이 모두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끼친다. 어떤 작가가 코로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 누군가는 이미 쓰고 있겠지. 나도 써볼까.


수영도 했다. 점심 먹고 바로 나갔더니 맨발로 데크를 밟을 수 없을 만큼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요일이면 공중목욕탕처럼 버글거리는 풀이 사뭇 조용했다. 평형과 자유형을 번갈아가며 왕복 130m 레인을 6번 돌았다. 1km 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웃 꼬맹이들이 왁자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풍덩풍덩 물에 뛰어들어 진로를 방해하는 바람에 서둘러 나왔다. 선베드에 누워 젖은 몸을 말리면서 다시 책을 들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뒤 섞여 즐겁게 수영하는 야외 수영장은 소란스러운 게 맞지만 이국의 언어는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말이 들려오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남자가 풀에서 나와 선베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리자 여자가 뒤따라 나와 따지듯 얘기한다. 왜 나만 남겨놓고 그렇게 혼자 나가? 나가면 나간다고 얘기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저기서 여기 오는데 무슨 얘기를 하냐. 나가면 나가는가 보다 하지. 그래도 그냥 그렇게 가면 내가 뭐가 돼? 자기만 추워? 나도 추웠어...... 남자가 듣기 지겨운지 다시 풀 쪽으로 몸을 일으켜 가자 여자가 쪼르르 따라나선다. 풀에 다시 들어간 커플은 물안에서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고 업었다 안았다를 반복한다. 남자의 눈은 먼산을 보고 여자의 눈은 남자의 얼굴을 향해 있다. 그들은 내가 한국말 알아듣는 사람이란 걸 모르니 목소리 낮출 이유가 없다. 남의 얘기를 모른 척 옆에서 듣는 나는 그게 새삼 재밌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안됐지만, 얘야, 언니가 보기에는 너랑 그 남자 잘 안될 것 같다. 남들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거지 같은 사랑. 나는 다시 책을 든다.


간단히 먹기로 한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고 하니, 며칠 전에 먹고 남은 반죽으로 김치전을 해 먹었다. 김치전만 달랑 먹는 게 아쉬워서 방울토마토도 같이. 그걸로는 목이 메어서 보이차도 같이... 결국은 보이차를 사들였다. 스무 살 이후로 차를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인이 잘 박히지 않았다. 첫 번째 시도는 아주 어릴 때 '홍차 왕자'라는 만화를 읽던 때였다. 팬심으로 몇 번 홀짝거리다 말았고 그 후로는 몇 번 녹찻잎을 우려먹으려고 다기를 이것저것 사들였었다. 다기뿐인가. 뜯어 놓고 반 이상을 버린 찻잎들이 얼마나 많았나. 여러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어떻든 보이차는 만들기도 마시기도 쉽다고 하니 일단 시작해 보려고 한다(어떻게 먹는지 유튜버들의 설명을 들었는데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차를 마시려는 동기는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마음이 작용했다고 봐야겠다. 여러 경로로 차 마시는 문화에 노출되었지만 단연 이효리의 보이차가 압도적으로 매력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부좌를 하고 차를 만드는 여유를 나도 갖고 싶네 라는 마음. 어차피 그녀처럼 살 순 없으니 차라도. 그리고나서 둘러 보니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실없는 이유로 시작하는 차가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덤으로 욕실 청소까지 했다. 평소에도 안 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구석의 묵은 때까지 벗겨내었다는데 공이 있다. 안 쓰는 칫솔을 들고 락스 칙칙 뿌려가며 타일 사이사이, 모서리 사이사이 곰팡이를 닦아 내었다. 변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까지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로 박박 밀었다. 나는 정리벽이나 청소 벽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아는 이 중 한 명은 빨래도 손으로 직접 하고(세탁기를 믿을 수 없어서다), 걸레질도 무릎을 꿇고 정사각형을 하나씩 그려나가면서 하곤 했다. 그녀가 일한 자리는 언제나 티끌 하나 없었다. 내게는 고행으로 보이는 일들이었다. 나는 굳이 나누자면 지저분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청소를 정기적으로 하지 않고 더러움이 눈에 보이는 날 한다. 게다가 더럽다고 느끼는 기준이 남들보다 현저히 낮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오늘은 시간도 있었고 마침 욕실이 더러워 보이기도 해서 마음을 다잡고 청소에 돌입했는데, 마치고 나자 기쁨이 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곧 더러워질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 이룬 일요일이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매일이 이렇다면 지루함에 몸이 꼬이겠지만 어쩌다 이런 일요일은 괜찮다.

내일 일터에 나갈 마음이 준비가 되었다.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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