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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n 05. 2020

여권 잃어버리면 생기는 일

호치민시에서 여권과 지갑 같이 잃어버린 이야기

   여태 살면서 지갑이나 휴대폰을 도난 당해 보지도 어디다 두고 와 보지도 않았는데 올 해만 벌써 두 번이나 비슷한 일이 있어서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나이 드는 것이란 게 이런 건가 싶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이니까 벌써 몇 달 전이다. 큼지막한 손지갑에 달러와 베트남 동을 잔뜩 넣어서 Be(우버 비슷한 차량 제공 서비스) 차량 에 친절하게 두고 내렸다. 그 안에는 공교롭게 여권이 같이 들어 있었다. 잃어 버렸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난 후였고 베트남 친구들을 동원해 내가 탔던 차량을 추적하여 기사와 통화하고, 나 다음으로 탄 승객과도 통화했지만, 그 누구도 "돈 뭉텅이가 든 네 지갑이 여기 있으니 가져가" 라고 선선히 내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긴 사람들은 으레 화를 내거나 한숨을 쉬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는 상당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갑을 추적하던 그 몇 시간은 그나마 희망줄을 잡고 있느라고 조금 긴장했었는데 영영 잃어버리게 됐다는 걸 감지한 순간부터는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새 지갑이나 사야겠군. 여권을 다시 발급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돈은 아깝지 않았다. 잃은 돈을 아쉬워하면서 화병으로 몸져 누운 사람들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방어 기제가 작동되는 듯 했다. 문제는 여권과 거주증(2년짜리 비자)이었다. 관공서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 발행하면 아무 문제 없을 테지만 베트남에서 관공서를 드나드는 일이란, 유쾌한 일이 아니란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다음의 일화는 관공서를 드나 든 여러 절차 중 극히 일부인데,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앞으로 호치민시에서 여권을 잃어버리게 될 사람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여권 분실 후의 첫 번째 절차는 분실 신고이다. 분실신고는 경찰서에서만 하도록 되어있다. 이 신고에서 주의 할 점 두 가지는 반드시 베트남 사람을 대동하라는 것과 꼭 관할 경찰서를 방문하라는 것이다.

   같이 일하는 동글동글한 직원 D를 데리고 경찰서 출동 준비를 마쳤는데 관할 경찰서가 세 군데나 되었다. 일단 가까운데를 찾아 갔더니 대번에 관할 아니라고 입구에서 차단 당했다. 이렇게 까지 차가운 이유는 무엇일까, 여권 잃어버린 사람 심정도 모르고. 그 때 부터 살살 심시가 뒤틀렸다.


    두 번 째 방문은 좀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전화를 미리 해 보았다. 경찰서라고 택시가 내려 준 곳은 창고로 알고 지나쳐도 무리 없는 모양새였다. 마침 찾아간 때가 점심시간 막 끝난 시간이었는지 경찰서 안은 절간 같이 고요하고 그나마 한 명 있는 듯한 직원은 창구 너머에서 책상에 발 올리고 낮잠 중이었다. 어딘가에서 고등학생 처럼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슬리퍼를 끌며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면서 샘플로 구비해 놓은 빛이 바랜 서식을 가리켰다. 여분의 서식이 있냐고 물으니 바깥에서 만들어 오라고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경찰서라는 곳의 내부에는 컴퓨터나 프린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서 터덜터덜 걷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나와 D는 택시를 집어 타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사진으로 찍어 온 샘플 서식대로 문서를 만들었다. 끝나지 않을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돌아갔더니 아까의 고등학생은 없고, 낮잠을 자고 있던 40대 정도로 보이는 제복 입은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 서식을 받아 들었다. 보기에는 흡사 두꺼비를 햇빛에 잘 구워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때부터가 시작 이었다. 이 두꺼비는 우리가 준 종이를 펄럭펄럭 흔들어 대면서 다짜 고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무 전조가 없이 시작된 일이어서 나와 D는 뜨악한 상태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듣는 사람이라고는 나하고  D 밖에 없어서 가만가만 얘기해도 다 들을 수 있었는데도 요란을 떨어대는 이 남자. 다분히 연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강짜로 보였다.

     요지는 이랬다.

  

 '네가 들고 온 이 종이를 어떻게 믿냐. 여권을 딴데서 잃어 버리고 와서는 우리 관할에 덮어 씌우는지 내가 알 게 무어냐. 접수 못 받는다. 도장 못 찍어 준다. 우리 관할 이미지만 나빠진다.'


  D가 여차 저차 설명을 해도 두꺼비의 목소리는 낮아지지가 않았다. 슬슬 치밀어오르기 시작한 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두꺼비의 두 번째 반론은 이거였다.


   '내 보스가 지금 자리에 없어서 도장 못 찍어줘.'


  다시 D가 도장 하나만 찍어 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는 사이 나는 그 순간 필요한 게 뭔지 깨닫고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은 절묘하게 D의 눈에 눈물이 고인 순간이랑 겹쳤는데 D는 그 즈음에는 거의 울고 있었다. 눈물 때문이었는지 지갑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꺼비의 목소리가 잦아 들고 그는 종이를 들고 어딘가로 훅 사라졌다. 1분도 아니었다. 약 20초 쯤 흐른 뒤에 다시 휙 나타난 두꺼비는 우리에게 도장이 찍힌 분실 신고서를 내밀었다. 내 손에는 이미 두꺼비에게 줄 지폐가 쥐어져 있었는데 D가 한사코 도장 받았으니 돈 안줘도 된다고 속삭였다. 지폐를 다시 지갑에 넣는 사이에도 두꺼비는 스위치를 끈 것 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뒤집어도 유분수지 저렇게 미친 사람 처럼 굴어도 관공서에서 안 잘리고 일할 수 있는 건가 싶어 기가 찼다. (안 잘린다.)


   '경찰서에서는 도장을 이런 식으로 받는 건가?'

돌아오는 길에 내가 D에게 물었다.

   '돈 달라고 그러는 거죠. 경찰에게 걸렸다 싶으면 무조건 우는 게 답이에요. 돈 없는 척, 불쌍한 척 해야 돼요. 근데 사장님이 외국인이라 하마터면 안 먹힐 뻔 했어요. '

이 동글동글한 배추 인형같이 생긴 D의 처세가 사뭇 경탄스러웠다.

   '저는 길에서 교통 경찰한테 걸려도 일단 울어요. 그럼 그냥 좀 세워 놨다가 보내줘요.'


    돈을 잃어버린 일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란 걸 베트남의 관공서를 다녀보면 알게 된다. 도장 하나를 받기 위한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여권과 거주증 등은 신주 단지 모시듯 보관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그 도장 하나 하나가 공무원들이 과욋돈을 벌 수 있는 공공연한 수단인 것은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저렇게 눈물바람이 통하는 공무원들이라니.  


    여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새로 만들었지만 거주증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국경이 닫히면서 거주증의 신규 발급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돈 다 내고 나니까 중단되었다고 해서 마냥 기다리는 중이다. 한국인 불 같은 성질 따위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애저녁에 알았으니 거울 보고 우는 연습이나 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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