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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n 07. 2020

2년 전 기억

일기는 남고 기억은 사라진다

2년 전에 쓴 일기가 있다. 그 즈음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통로는 오로지 일기 밖에 없다.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2018. 3. 26. 월요일


숙제를 마치지 못한 채 하루를 마치는 중학생 같은 마음이다. 나를 꾸중할 선생님은 없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선생이 없어 더 혹독한 것이다.


    진원군이 한국에 간 이틀 째. 없으니 이렇게 헛헛하다. 가족이란 그런 것인가. 있을 때에는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없어 보니 알겠다. 진원군이 없어서 외롭다. 나비(우리집 고양이)가 있어 좀 다행이랄까. 지금은 모모(이웃집 고양이)까지 와 있는데 둘이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 요란들 하다. 격하게 달리고들 있다.


  쉰 살이라고 가정해도 산 만큼을 더 살아야 한다. 요새 100세 인생이란 말은 지루할 만큼 보편적이고 어느 책은 120살까지 사는 얘기 하더라. 그리 될 것 같다. 교통사고로 죽거나 강도 사건으로 죽거나 하지 않는 이상 오래 살게 되겠지. 암도 치료할 테고 곧.


   스무 살 시절, 심지어 서른 살 넘어서도 한참, 인생을 계획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결정하면서 살아보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흔 살 넘어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으로 10년, 20년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루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고, 글 쓴 답 시고 진원씨랑 같이 손가락 빨게 될까 봐. 늙은 부모님에게 기대어 살게 될까 봐. 스무 살 시절의 막연하고 달뜬 생각들과는 다르게 곰곰이 생각한다. 마음도 무겁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더욱 몸을 불 살라 일들을 하는가 보다. 자식 있으면 더할 테고. 노년 생각해서, 자식들 생각해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그런 의미에서 치타(당시 내 보스)는 지금 어디 쯤 있는 걸까. 아직 유한 계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니 노년과 자녀 교육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겠지. 조 단위의 재산이 있으면 마음을 놓을라나. 큰 착각이지. 조 단위 재산 있다고 누가 마음 놓고 놀더냐. 중흥 사장 베트남에 아파트 단지 올리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디. 욕망이란, 경쟁심이란.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현상으로서 파악 가능한 일들이다.


    <복지 국가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부제가 ‘사회 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이라고 되어 있다. 세상에는 멋진 부부들이 꽤 있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만 평생의 동지 및 동반자로 산 줄 알았더니 여기 영국 부부 The Webb 이 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영국의 자유당을 대체하는 노동당을 창당한 이들. 어떻게 하면 부부가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이루어 평생을 이념과 사상의 동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나와 내 주변을 봐서는 참 힘든 일로 보인다. 이건 부부가 가정의 번영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 동고동락했다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이다. 니어링 부부와 웹 부부는 자녀가 없는 삶, 사회주의자의 삶, 신분과 지위의 격차를 뛰어 넘은 삶, 그리고 노년을 마무리할 때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닮았다. 세상에 이혼 않고 백년해로 하는 사람은 많지만 부부가 뜻을 모아 세상을 바꾼 경우는 흔치 않다. 멋있어. 참 멋있다.


      일단 진원군과 내가 신념을 위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소신껏 사는 것은 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 없이, 동물과 함께, 시골에서, 글을 쓰고 농사를 지으며 해로하자. 아, 진짜 진짜 진짜 그렇게 살고 싶다.



 일기를  정확히   후에 호치민에서  홀로 창업했다. 시골 타령 농사 타령은 사직서 제출의 전조현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헛발질 하고 사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일기는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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