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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l 12. 2020

복수의 화신

기린이 로지에게,


‘그만두고 나가서 대표님에게 복수하려는 거예요?’


하고 물었을 때, 로지는


‘에유, 무슨 소리세요, 복수라뇨.’


라며 손사래를 쳤다.


  기린과 치타는 부부이다. 치타는 ‘대표님’이고 기린은 ‘이사님’이다. 그녀는 ‘세계 1등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로지의 보스였다. 로지는 몇 달 전에 제출한 사표가 수리된 후, 마지막 근무 날짜를 받아 놓고 있었다. 작별 인사나 할 겸 기린에게 들렀을 때 로지는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복수라는 단어를 들었다. 나가서 복수라도 해야 할 만큼 나를 섭섭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로지는 그 쯤에서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기린이 꼬치꼬치 질문을 해 댔기 때문이다.


 기린이 처음, 복수, 라는 말을 입에 올린 이후로, 로지는 가끔 복수에 대해서 생각했다. 치타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기는 했다. 대표님, 이라는 말이 8년 동안의 습관으로 입에 붙어서, 싫어 죽겠는데도 자꾸 님, 님 하게 되니 그게 싫어서 치타,라고 이름을 붙였다. 너무 괜찮은 동물 이름을 붙인 것 아니냐고 누가 로지에게 물었다. 사실은 하이에나라고 하려다가 네 글자가 길어 부르기 좋으라고 치타로 정했다고 로지는 대답했다. 사실 로지에게는 치타를 원숭이인 줄로 알던 시기가 있었다. 그녀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타잔이 치타-하고 부르면 원숭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떻든 치타와 로지는 쌍욕과 고성이 오가는 정도까지 싸우다가 결별했다. 복수라. 로지에게 복수란 쿠엔틴 타란티노의 주인공들처럼 원수가 있는 곳을 힘겹게 찾아가 안위를 확인한 후 목을 베거나 총질을 해 대는 행위였다. 그녀는 굳이 킬빌의 우마 서먼처럼 장검을 들고 찾아가 그걸 치타 앞에서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치타를 길에서라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어떻든 복수보다 중요한 건 퇴사 후에 먹고 살 방법을 확실하게 마련하는 것이었다. 복수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로군, 로지는 생각했다.


 로지가 치타의 사업장이 있는 곳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자리에 창업을 하고 두어 달쯤 지났을 때 내용 증명이 날아왔다. 치타가 보낸 것이었다. 로지가 자기 회사에서 8년 일하다가 나갔으니 응당 프로그램을 훔쳐다가 도용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 찬 문장들이 넘쳐났고 요는, 금전으로 보상하라는 내용이었다.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는 내용도 같이 있었다. 그런 걸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로지는 겁이 더럭 났지만 야단법석을 떠는 직원들 앞에서는 태연을 가장하느라고 하하 웃었다. 그럴 때는 무대응이 최고라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후 로지는 내용 증명 따위는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 후로 몇 달간 더는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아서 변호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로지로서는 다행이었다. 대신 이번에는 치타가 했다는 로지에 대한 악담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걸 치타로부터 직접 들은 고객들이 쏜살같이 로지에게 찾아와서 미주알고주알 얘기해 주었다. 로지는 이번에도 그냥 웃었다. 설마 나를 겁내는 건가.


일 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그 사이 로지네는 더 이상 투자금을 받거나 빚을 내지 않아도 될 만큼 수익을 내게 되었다. 치타의 고객들이 심심치 않게 로지 네로 흘러 들어왔다. 달갑지 않았지만, 막을 재간은 없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한결같았다. 지금 거기 엉망이에요. 그래도 전 직장인데 엉망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로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바로 그즈음, 모든 사업체들이 몇 달간 문을 닫는 일이 생겼다. 로지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치는 일은 영화적 과장인 줄 알고 있다가 현실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그녀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자 화가 났다. 로지는 화를 냈다 푸념을 했다를 반복하면서 한 달을 보내고 나서야 부랴부랴 휴업 상황에서도 살아날 방법을 강구했다. 다행히 고객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두 달이 더 지난 후, 로지네로부터 20분 떨어진 치타네 사업장이 완전히 폐업한다는 얘기가 흘러들어왔다. 소문에는 월세를 낼 돈이 없어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베트남에 있는 모든 지점을 접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었다. 로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몸담았던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속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로지는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그날 밤 혼자서 와인병을 땄다. 그녀는 모든 일에는 흥과 망이 있고, 성과 쇠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누가 누구 때문에 망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냥 때가 되어 망하는 거지. 나도 뭐, 때가 다하면 문 닫는 거겠지. 로지는 비극과 희극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불쑥불쑥, 설마 이런 게 복수는 아니겠지, 그녀 자신에게 되물었다.

  


다시 일 년 전, 마지막 인사나 할 겸 로지가 기린을 찾아갔던 그 날에, 기린이 물었다.


-퇴사하면 뭘 할 생각이에요?


-당분간 쉬면서 뭘 할지 생각해야죠.


-한국에는 안 올 생각이고요?


-네, 베트남에서 살아보려고요.


-결국은 거기서 사업하게 되는 거겠죠?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대표님이랑 경쟁하게 되는 거예요?


-글쎄요. 결정된 건 없어요. 그렇지만 일단 대표님이 제가 이 회사 프로그램을 쓰겠다고 한 걸 거절하셔서요. 알아봐야죠.


-대표님도 프로그램 줄 준비가 안돼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시겠죠.


-그동안 같이 일한 정이 있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상.... 그렇게 할 수가 없겠네요.


-괜찮아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기린과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당시, 로지의 창업 계획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치타네와 20분 거리인 건물 1, 2층에 다음 달에 입주해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고 건물주와의 계약서에는 도장을 찍어 놓은 상태였다. 필요한 프로그램도 이미 리서치가 끝나 있어서 계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하필 치타, 기린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소문난 G사의 프로그램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G사의 프로그램이 훨씬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로지로서는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치타가 로지의 프로그램 사용 요청을 거절한 것은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새 회사의 구성원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 로지의 퇴사가 확실시되었을 때 자기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 달라고 졸랐던 두 직원이 두 달 후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군가 이걸 복수라고 부른다면 로지는 또 한 바탕 웃게 될 것 같았다. 로지가 생각하는 복수란 우마 서먼이 이소룡의 유니폼을 입고 장검을 들고 찾아가 내 검을 받으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복수란 상대방이 이게 복수라는 걸 확실하게 알아야 끝나는 것이다. 검을 받은 후 다시 회생할 수 없어야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들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들이 당사자를 기필코 찾아 가 끝장을 보는 것 아니겠는가. 로지는 아직은 그럴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그녀는 이태원 클래스의 박새로이를 보면서 젊네, 젊어 라면서 혀를 찼다. 로지는 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갈리는 감정 따위는 싹 다 날리고 이해관계만 생각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떻든 전 세계가 당한 재앙에 여기저기에서 사업을 접었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치타네 베트남 사업장도 그 피해를 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치타는 여기저기 부동산에 박아 둔 게 많아서 직원들은 떨려 나도 본인은 끄떡 없을 거라고들 얘기하니 누가 누구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굳이 로지가 치타를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장검 말고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가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치타가 로지를 그렇게까지 내몰지 않았다면 어영부영 그 회사에 빌붙어서 상사 비위나 맞추고 있을 터였다. 극한으로 몰아준 덕에 뛰쳐나와 내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알고 보면 그가 로지의 은인이 아닌가도 싶었다. 내가 들고 간 과일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알아서들 하셔, 라면서 로지는 잔에 남은 와인을 꿀꺽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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