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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Aug 17. 2020

검은 고양이

피곤한 퇴근길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동그란 호박색 눈 두개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안녕, 나 왔어."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다. 그저 평소의 습관이다.

"늦었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발을 벗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까망이 뿐이었다.

"네가 말한 거야?"

내가 까망이를 마주 보며 물었다. 까망이의 귀가 움찔거렸다.

"... 헛게 들리네. 네가 말을 할 리가 없지."

나는 중얼거리면서 가방을 식탁 위에 내던지듯 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까망이가 식탁 위로 사뿐히 올라오더니 가방에 올라앉아 다리를 앞으로 모은 채 말했다.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네."


내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말은 언제부터 한 거야?"

까망이가 꼬리를 까딱거렸다.

"처음부터"

“왜 그동안은 숨겼던 거야?”

까망이의 수염이 꿈틀거렸다.

“피곤해질까 봐.”

맞는 말이어서 딱히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왜 갑자기 오늘은.."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

나는 오던 길에 목이 말랐던 게 떠올라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까망이는 그 사이 열린 냉장고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물병이 없고 대신 맥주캔이 두 개 있었다. 냉장고 앞에 선 채로 캔을 땄다. 냉장고 문을 닫고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아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대로 쭉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멈추었다. 까망이는 다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나쁜 일이야?"

내가 물었다.

"아니."

"좋은 일이야?"

내가 다시 물었다.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까망이의 윤기 흐르는 털들이 잠시 부스스 일어섰다가 가라앉았다.

"이도 저도 아니면 뭔데?"

나는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도 뭘 좀 줘봐. 너만 마시지 말고."

까망이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나는 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호박색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다시 열어 '말린 연어'라고 쓰인 봉투를 꺼냈다. 까망이는 어느새 탁자에서 내려와 내 발목에 볼을 비비고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자 그도 다시 탁자 위로 올라앉았다.

"자 말해봐. 말하면 줄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데?"

"연어부터 내놔."

나는 봉투를 열어 길게 잘린 연어 조각을 꺼내 까망이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까망이의 혀가 날름 연어 조각을 채갔다.

"자. 말해 이제."

까망이가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한테 남자가 생길 거 같아."

"남자? 어떤 남자!"

"연어 봉투째 줄 거야?"

 나는 봉투를 까망이 앞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까망이는 봉투 안으로 코를 들이밀고 날름거리며 연어 몇 조각을 더 먹었다. 내가 얼른 봉투를 낚아챘다.

"어떤 남자. 빨리 말해, 이제."

까망이가 혀로 제 입 주변을 핥았다.

"회사에 키 큰 남자 있지?"

"키 큰 남자? 이 팀장? 정대리? 누구? 키가 얼마나 큰데? 180이 넘어?"

"훨씬 커."

"그래? 우리 회사에 180 넘는 사람은 없는데.. "

"그럼 지하철에서라도 키 되게 큰 남자 본 적 없어?"

"지하철에야 넘치고 넘쳤지."

"여하튼 키 엄청 큰 남자랑 너랑 같이 있는 게 보여."

"너.. 진짜 뭐가 보이는 거야? 검정고양이... 뭐 그런 거야?"

까망이가 다시 연어 봉투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나랑 그 남자랑 둘이 뭘 하는데?"

내가 봉투를 손에 꼭 쥔 채로 물었다.

"잘 될 거 같아. 둘이 마주 보고 웃고 있어."

"돈이 많아 보여?"

"그런 거 같아. 때깔이 좋아."

"잘 생겼다는 뜻이야?"

"빠지지 않아."

"키 큰데 돈도 많고 잘 생겼다고?"

나는 말린 연어 봉투를 뒤집어 흔들어 연어 조각을 탁자 위에 흩뿌려주었다. 까망이가 폴짝 거리며 연신 혀를 날름거렸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가 부스스한 진원 군이 파자마 차림으로 나왔다.

"왔어? 몇 시야. 늦었네. 맥주 마셔? 맨날 술이냐. 뭔데. 까망이는 지금 뭘 먹고 있는 건데? 당신 미쳤어? 저 연어를 다 주면 어떻게 해! 저거 오늘 사온 건데. 내가 그렇게 한꺼번에 주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 또 까망이가 먼저 꼬셨다고 하려고 그러지. 오늘은 까망이가 뭐라고 그러디. 돈 많은 새 서방이라도 만난다고 하디? 내가 애를 가르쳐 놓으면 뭐해. 저렇게 아무거나 있는 대로 다 줘버리니 애가 당신만 보면 냐옹 거리면서 간식 달라고 난리지."

진원 군이 남은 연어를 탁자에서 후다닥 거두어 가자 까망이는 뭐가 억울한지 큰소리로 야옹야옹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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