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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Nov 05. 2020

걷다가 정들겠다

여전히 매일 걷기를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복 차려입고 나가서 5km에서 6km 사이를 걷는다.(그중 2km 정도는 천천히 달린다.) 주말에는 더 멀리 나간다. 8km에서 10km가량을 걷는다. 경로는 매번 같은데 경치는 매일 같지 않다. 햇살이 내리쬐는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는 탓인가 싶다. 어쩌면 그 날 그 날의 음악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느 날은 전날 밤에 다운로드한 매불쇼를 듣는다. 그럼 경치는 또 달라진다.


한 번도 이 도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튼 처음부터 좋아서나 싫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살게 된 도시인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만 4년을 살고 나서야 호찌민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걷기를 시작한 이후로 봐야 할 것 같다. 지난 4월 펜대믹으로 도시 전체에 자물쇠가 달린 형국이 되면서부터 나는 동네 언저리를 걷기 시작했다. 수영장도 짐도 모두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주변만 빙빙 돌았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꺼림칙했다.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어디를 걸어서 간다는 것이 상당히 낯선 개념이다. 일단 거리는 타는 듯 뜨겁거나 미친듯한 비가 내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호찌민의 시민들은 5분 거리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나는 언제나 Grab이나 be 등의 서비스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다. 자동차 안에 앉아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지금은 전혀 애틋하지 않다. 처음에 왔을 때에야 모든 게 낯설어서 오토바이 떼도, 직사각형의 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거리도, 말도 안되게 비효율적인 도로의 노선도, 최신식의 쇼핑몰과 때국 묻은 수레가 나란히 장사를 하는 풍경도 다 재미가 있었더랬다. (여전히 좋은 것 중 하나는 일년 내내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일상이 되고 때로는 귀찮음이 되고 짜증이 되기도 한다. 차 안에 있어 다행이다 싶게 바깥은 살풍경으로 보인다. 단지 차 유리문 하나로 나뉘어 있을 뿐인데 이곳과 저곳의 거리가 닿지 않을 만큼 멀다. 지난 몇 년간 이 도시의 살풍경을 서울시 송파구와 비교하면서 보행자의 도시가 아닌 곳에 사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이유로 반경 1km 이내에서만 왔다 갔다만 하다가 주춤주춤 걷는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단지 매일 같은 곳만 빙빙 돌고 있는 게 지겨워서였다. 3km, 4 km, 5km 거리는 점점  늘더니 결국 집으로부터 10km 떨어진 곳까지 걷게 된 날,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이 도시에서도 걸을 수 있다. 내가 걸으려 하지 않았을 뿐.


그동안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마 제일 불안했던 것은 중간에 길이 끊겨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막상 걸어보니 허튼 걱정이었다. 길은 어떻게든 이어져 있고 한 사람 걸을 정도의 보도는 어디에나 있었다.


다음은 치안이 되겠다. 도시의 새로운 정착민들에게는 으레 그렇듯 지갑이나 휴대폰을 날치기당했다, 강도를 당했다는 등의 괴담이 먼저 들려오기 마련이다. 나도 그런 소식들에 기가 죽었더랬지만 막상 살아보니 이 도시는 생각보다 안전했다. 무엇보다 걷는 사람이 아예 없다시피 한다. 다들 오토바이를 타고 휘잉 휘잉 지나가면서 나를 흘긋거린다. 저들은 어쩌면 이상한 차림으로 걷는 나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러 환화게 웃는 낯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지나가는 라이더도 있다. 그런 날엔 왠지 응원받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발에 쓰레기가 차이는 것도 성가신 일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얻겠다고 걷는 중에 수북한 쓰레기를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직도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호찌민시에 많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열심히 치우기도 하는지 아직 쓰레기 '더미'를 만나지는 못했다. 특히 관공서나 학교 주변은 깨끗하게 관리되는 편이다. 간혹 발에 차이는 쓰레기를 만나면, '주워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 실행은 못했다.


다음으로 찜찜하게 여겼던 것은 쥐이다. 길에서 쥐를 만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다. 죽은 쥐든 산 쥐든 어지간하면 만나게 되어 있다. 쥐 공포증이 있는 나는 거리에서 쥐를 만날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런데 쥐보다 더 끔찍한 건 로드킬 당한 동물들일 것이다. 언젠가 길에서 고양이 시체를 보고 나서는 그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도 그 자리를 지나가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자리를 지나간 어느 날, 이런 공포감은 마음먹기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실재하는 두려움이든 상상 속의 두려움이든 이제는 마주 보았고 해결되었다. 그러고 났더니 도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꽁꽁 박혀 있던 이 도시에 대한 편견이 하나 둘 깨어져 나가면서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걷는 행위는 사실은 고행에 가깝다. 그러다가 예고 없이 휙 부는 강바람에 잠깐 땀이 마른다. 그 바람에 실려 온 강 비린내와 꽃향기를 맡으면서 잠시 쉰다. 이내 다시 걸어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질 무렵 하늘이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 때문에 생쥐꼴이 되고 만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생각될 즈음 도착한 카페에서 아무 과일 주스나 짚이는 대로 시켜보라. 눈이 확 뜨이면서 오, 소리가 나온다. 고단한 다리를 쉬이며 마시는 얼음 달그럭거리는 음료가 위안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호찌민시에서 걷는 사람만이 누리는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이 도시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거주하게 될지 아직 계획이 없다. 그런데, 땀에 흠뻑 젖어 걷던 호찌민시의 풍광을 그리워하고 있을 먼 훗날의 내가 이미 그려진다면, 그건 이 도시에 정이 들었다는 얘기가 되겠지. 지금이라도 이 곳, 여기에서, 걷기의 기쁨을 재발견하게 되어 많이 많이 마않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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