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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Nov 23. 2020

위대한 자본주의의 크리스마스

불교가 강한 국가인 데다가 겨울도 없는데 캐럴은 일찍도 틀어댄다. 심지어 크리스마스는 쉬는 날도 아니다. 그런데도 핼러윈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캐럴이 쏟아져 나온다. 호찌민시 말이다.  


겨울이 아닌 계절의 크리스마스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좁은 생각이다. 남반구의 국가들 그리고 겨울 없는 국가들에서야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호찌민에서 10년 넘게 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핼러윈이고 크리스마스고 대중화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단다. 쇼핑몰이 생겨나면서부터 서양 명절을 떠들썩하게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산타 클로스와 크리스마스의 상업화는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미국에서 문학작품과 영화들이 나오면서 더 대중화되었다. 전 세계의 대중문화가 미국 문화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으니 베트남이 크리스마스 무드를 11월 1일부터 즐긴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심지어 블랙 프라이 데이도 어찌 나들 얘기를 하는지 그날 뭘 사지 않음 안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것 역시 미국에서 건너왔다.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쇼핑을 하던 것이 블랙 프라이데이로 자리를 잡았다. 언젠가 뉴스에서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서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호찌민에 와보니 벼르고 별렀던 아이템을 그 날에 지르는 사람들이 많더라. 직원 중 하나도 엄마에게 식기 세척기를 사주려고 블랙 프라이데이만 기다리고 있단다. 쇼핑몰에는 이미 할인 배너가 즐비하다. 돈 쓰라고 난리다. 이놈의 자본주의.


돈 쓰라는 아우성은 핼러윈을 준비하면서 시작된다. 핼러윈 끝나면 크리스마스, 다음은 연말연시, 그리고 베트남 최대 명절, Tet까지. 10월부터 2월까지는 지갑을 탈탈 털리는 시기이다.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다.


그나저나 호찌민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배척이라는 게 없는 듯하다. 뭐든 참으로 쉽게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경제 성장의 가속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질적으로 오픈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호찌민 시에 스타벅스 1호점이 오픈했던 2015년의 어느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줄을 선 것이다. 회사고 학교고 늦어도 개의치 않았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전설처럼 돌아다닌다. 얼마 전에 유니클로가 오픈했을 때도 장사진을 이루긴 마찬가지. 무지 무인양품이 팝업 스토어를 열었을 때에도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줄을 서는 것에 소질이 없다.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화가 올라온다.) 특히 호찌민의 식당을 보면 그렇다. 호찌민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1군, 그리고 2군의 타오 디엔이라는 동네에 가면 전 세계의 음식이 거의 다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의 서양 음식들은 물론이고 멕시코, 브라질, 지중해, 인도 음식을 하는 식당들도 다양하고 한국, 중국, 일본 등도 선택지가 많은 편이다. 다운타운 자체가 서울의 이태원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세계 각지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호찌민시 특유의 개방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외국인 여행객도 많고 놀러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도 많은 듯하다. 통계를 보았더니 호찌민시에 사는 외국인만 8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기관에서 놓친 것 같다) 체감적으로는 훨씬 많다.  


듣자 하니 수도인 하노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한다. 방문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날씨 후지고, 사람들 불친절하다고 입을 모아 불평을 하더라.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불만 가득한 후일담을 듣고는 가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여하간 이번 크리스마스엔 무엇을 할까 생각 중이다. 같이 일하는 유럽에서 온 직원들을 보니 매년 자기들끼리 크리스마스 조찬을 즐기는 듯했다. 나도 진원 군과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이나 먹을까 생각해보지만. 세계의 명절이라고 떠들썩해 봐야, 그래 봤댔자 먹고 마시고 하는 일들의 연장에 불과하다. 더 재미있게 보내려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손편지를 쓸까? 뭐라고 써?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자고 써? 아고 귀찮다. 지인들에게 선물을 사서 줄까? 결국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만든 상술에 말려들고 마는 것인가.


너무 이른 캐럴이 거슬려서 쓰기 시작한 글이 결국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끝나는 것을 보니 캐럴의 상술은 성공했다. 위대한 자본주의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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