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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Dec 02. 2020

어딘가에는 사랑의 결정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남편에게는 내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그는 바로 답을 않고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지옥같은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만난 그는 당시 신촌에 새로 개장한 뚜레쥬르에서 나를 걷어 차고 만다. 내가 제 엄마를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러 번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회자되었지만, 다시 또 들먹이자면, 나의 시어머니는 살림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일도 없는 분이었고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바로 전날까지도 팔십세의 노구를 오토바이에 싣고 서대문구를 누비던 분이다. 내가 고백했을 당시는 둘 다 스물네 살의 나이였는데 그는 용케도 내가 제 엄마와 닮은 것을 간파해냈다.


고백을 하기 전 일 년 동안, 나는 혼자서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매일이 마음 찢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럴 나이였다.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쏟아부을 대상, 마음을 다할 대상을 찾고 있던 중에 마침 그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짝사랑하는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모두 그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가 오늘은 이런 말을 하고 저렇게 웃었다.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그도 나를 좋아하나.' 뭐 그런 내용들이었던 같다. 물론 모든 게 나의 뇌피셜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친 증기 기관차처럼 폭주할 지경이었다.


그가 내 고백을 거절한 후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지만 오히려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더 이상 속 끓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남편은 내가 너무 안됐다 싶었던지, 굳이 사귀어보자는 메시지를 뒤늦게 보냄으로써 꺼진 불씨에 불을 지폈다. 거절 해 놓고 연락은 왜 다시 한 거냐고 몇 년이 지난 후 따져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는, 동정심이 발휘되었던 거라고 결론지었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가서 얘기해보자. 나의 프러포즈는 저돌적이고 단호했다. 당시에 신촌에는 클래식만 틀어주는 카페가 있었고 너나 나나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나는 굳이 그를 거기로 불렀다. 편지나 쪽지 따위를 얌전히 보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가 않았던 것이다. '너를   동안 좋아해 왔고, 이제 고백할 때가 되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결혼이 전제되지 않으면 나는 시작할 마음이 없다.' 그걸 말로 전달했다. 그렇게  거였다. 지넌군이  고백을 듣고 거절을  것은 얼마나 이성적인 판단이었던가.


그래, 사귀어보자 라는 제안이 동정심이었건 말건 마음이 급했던 나는 결혼부터 선언했다. 일단 부모님이 반대를 하고 나섰고 나를 아는 친구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의 부친은 자신이 정하지 않은 남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에 분개해서 서울에 살던 나를  날로 지방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그리고 친구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결혼  한다더니? 학창 시절 남학우들과(특히 예비역 선배들) 말다툼을 일삼던 나를 줄곧 옆에서 봐온 친구들이었다. 입버릇처럼 '결혼은  것이 아니야. 남자라면 아버지와 남동생만으로도 이가 갈려'라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여하간 부친 덕에 일 년 동안 떨어져 지내다 둘 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결혼에 이르렀고 2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중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오직 한 가지 서로 동의했던 점은 아이 없이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어지간하면 사랑하는 연인들을 너그럽게 봐 줄만도 한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 상태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만 해도 그렇다. 현상으로서는 사랑해서 결혼했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결혼했다, 가 더 정확한 설명이다.


'너네 아버지가 하도 강하니 너도 빨리 결혼해서 도망치고 싶었겠지.' 친하게 지내던 동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한 말이다. '네??' 하고 말았지만 그 날 이후 그게 내 결혼의 진짜 동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설로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지넌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 아버지한테 질려서 완전히 반대인 남자를 고른 거지'라고 수군거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성정의 남자인 것이다. (나의 부친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고 믿고 있고 지넌군은 그림자처럼 사는 것을 즐긴다.) 아이 없이 살아보자는 지넌군과 나의 의기투합에는 각자 부모의 영향력이 없었다고 장담하기가 어렵다. (나는 내 부친을 반평생 미워하며 지냈고 오 형제의 막내였던 지넌군은 제 어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부친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게 내 결혼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 상태이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심리적 상태고 트라우마고 다 필요 없는 100%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 같은 것도 존재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보다 복잡다단한 존재이다. 첫눈에 반하고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 그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비밀스럽고 이기적이고 단순치 않은 각자의 이유들이 반영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않고 혀를 끌끌 차고앉았으며, 직원들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라고 데리고 나타나면 괜스레 실눈을 뜨고 이 질문 저 질문하고 앉았다. 조심스럽지만, 제일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가 '노트북'이다. 영화가 끝나고 실소를 했다. 뭐라는 거야? 그래서 '노트북'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역시 실눈을 뜨고 다시 본다. 많이 비뚤어졌다.


더 나아가 아주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 보자면 '나를 왜 사랑해?'라는 질문에 가장 적합한 대답은 '요즘의 내 호르몬 활동이 왕성해서' 일 것이고 조금 더 짓궂은 대답은 '일상이 지루해서' 이거나 '문제가 있는데 도망치고 싶어서' 일 것이고 다양성을 추구한다면 '안정감을 얻고 싶어서' 이거나 '네가 내 말 잘 들을 것 같아서' 정도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가 존재 할런지도 모르고 그게 놀랍게도 당신의 경우일 수도 있다.)


재차,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경험을 반영한 개인적 의견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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