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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an 14. 2021

소설 읽기는 접신 행위라던 말

어떤 책이었는지 제목은 기억나질 않는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에서 본 듯한데, 요지는 소설을 읽는 행위는 접신 행위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소설에 몰입을 하면 현실세계와는 다른 곳으로 들어가서 실제 하지 않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걸 실제처럼 여기게 된다. 그리고 문득 책에서 고개를 들고 현실을 응시할 때는 오히려 현실을 생경하게 느끼는 것이다. 때로는 소설에서 받은 영감이나 영향력으로부터 빠져나와서 현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영혼에 빙의되는 것과 통하는데 가 있기는 하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조그마한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었다. 아빠는 서울에서 공부 중이었고 엄마는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를 꾸려 가족들의 생계를 건사했다. 서울에서 지내는 아빠를 뺀 나머지 세 식구는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단칸방에는 외삼촌까지 더부살이 중이었다. 그럼에도, 없는 살림에 떡 하니 윗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게 어린이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어린이 버전이었어도 꽤나 두터운 책들이었는데 컬러로 된 삽화가 많이 들어있었다. 156권이 3층짜리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다분히 그 단칸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부친은 내가 네 살이 되면서부터 문학전집을 끊임없이 조달해 주었다. 집이 가난한 탓에 마땅히 놀 만한 장난감도 없었고 심지어 TV도 없었지만 책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그게 부친의 청사진이었는지 여하간 나는 책꽂이 앞에서 놀았다. 책을 들추어 삽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저물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책꽂이 앞에 엎드려서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도 저도 지겨워지면 글도 읽었다. 특히 삽화가 아름다운 책들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삽화가 아름다운 책은 아니었다.(삽화로 치자면 <작은 아씨들> 이 최고였다.) <톰 아저씨의...>는 오히려 인체의 균형이 깨진 그림들 때문에 인물들이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구미가 당기는 책을 다 읽고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지자 골라 든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중까지 미루고 미루다 읽게 된 책 중에는 <쿼바디스>도 있었다. 어린이 전집에 <쿼바디스>라니...) 여하간 지금이야 책의 상세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톰 아저씨가 선사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는 베개를 벤 채로 모로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단칸방에는 책상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을 펼쳐 든 이후로 꼼짝도 않고 읽어,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엄마가 저녁을 먹자고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국 냄새 밥 냄새가 방안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여러 번 나를 불렀는지 '가시내야,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라면서 엄마가 등짝을 때렸을 때는 베고 있던 베갯이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일어나 앉아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따졌다. "톰 아저씨가 죽었다고! 조지가 왔는데도 죽었다고! 엄마는 어떻게 그것도 모르고 밥만 먹으라고 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미국의 1850년 대 즈음에 살았을 톰 아저씨의 세계와 저녁밥을 먹으라며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있는 현실 세계의 접점을 당시에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나의 슬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밥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도 무진장 외로웠던 게 기억이 난다. 나란히 밥상 앞에 앉아 있지만 나만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절대 고독. 지금에 와서야 그 기분을 말로 정리할 수 있다. 그 때야 엄마도 밥상도 그저 미웠을 따름이다.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울고 웃고 했겠지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인생 첫 소설이라고 할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처음으로 정신은 소설의 세계에 몸은 현실의 세계에 분리되어 있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걸 빙의나 접신 행위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김영하 작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소설을 읽는다. 여전히 소설 읽기는 재밌다. 읽는 동안에 현실에서 잠시나마 분리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히 초등학생 때와는 다르다. 모든 게 새로웠을 시절에는 무아지경으로 주인공과 스토리에 빠져들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빠져들만한 소설을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이건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고 핑계를 대가며 까탈을 부리는 중이다. 다 나이 탓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에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는 일이 많다. 주로 오래전에 죽은 작가들의 책이다.


생각 난 김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다시 읽어 볼 생각이 들었다. 인종 문제가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오른 지금 톰 아저씨를 다시 만나도 초등 3학년 때의 마음이 들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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