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월남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망나비 Feb 10. 2021

수채화와 조바심병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수채화 물감과 도화지를 들고 가서 그렸던 교실 화분이 생각난다. 이 쪽은 어둡게 이 쪽은 밝게, 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완성한 화분 그림이 아직도 생각나는 걸 보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긴 했던 모양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수채화는 내내 배우고 싶었다. 다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대 우선순위에 밀려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건.... 아마 핑계일 것이다. 배워서 잘 그리고 싶지만,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을 내야 하고 뭔가를 사들여야 하고 물감과 도화지를 펼쳐 놓아야 하고 그걸 할 공간이 필요하고 다 그리고 나면 치워야 하고.. 뭐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해야 하는 것이 당최 귀찮게 느껴졌다. 게다가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올 때까지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적잖이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시작도 않고 만족을 찾는 것이 얼토당토않게 들리지만 사실이, 그랬다.


항상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야지, 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가 직원 한 명이 'Tipsy Art'에서 여는 클래스에 초대해 주어서 우연찮게 붓을 들게 되었다. 이 클래스는 우리가 어릴 때 봤던 밥 로스 아저씨의 '그림을 그립시다'와 비슷하다. 밥 아저씨가 그랬듯 한 명의 전문가가 앞에 나와 시범을 보이면 거기 앉은 30여 명의 수강생들이 동시에 그 그림을 따라 그리는 형태이다. 같은 걸 보고 그리는데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거기 앉아 있다가 깨달은 한 가지는, 붓을 들고 있었던 두 시간 여가 마법처럼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얼마 안 있어 도화지, 붓, 물감을 잔뜩 사들이고 말았다. 그림 그리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밥 아저씨는 유화를 그렸고, Tipsy Art에서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지만 나는 수채화를 선택했다. 어릴 때 수채 물감을 썼던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바닥이 말갛게 느껴지는 그림들이 예뻐 보여서이기도 했다. 시작만 하면 당장 명작을 그릴 것 같은 기세였는데 시작하고 하루 만에 깨달았다. 나는 이 얼마나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인가 말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수많은 작가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그림들과 동영상을 보면서 매일매일 더욱 손을 앞으로 모으게 되었다.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는 법이다. 뭘 모를 때에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감 뿜뿜인 것이고.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해변의 모래처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과 같은 이치이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시간 순삭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확연히 다른 한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글을 쓸 때에는 머리를 쥐어뜯는 고뇌와 성찰의 시간이 동반된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썼다 지우고 읽었다가 고치는 과정은 가히 육체노동과 맞먹게 에너지 소모가 많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움직인다. 반면 그림 그리기는 마음과 뇌를 고요하게 만든다. 붓을 들고 한 올 한 올 색을 칠하고 있으면 고요한 호수에 떠 있는 나룻배 같은 기분이 든다. 명상을 해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미술 치료라는 게 존재하는지 왜 고통받던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고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린 지 한 달 된 왕초보의 얘기이다. 프로의 세계에는 어떤 긴장감이 존재하는지 개뿔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게다. 포인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우리 엄마는 예순 살이 넘어서 미용도 배우고 오카리나도 배웠다. 매일 연습하면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라고 했었다. 입으로 소리 내어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엄마의 자유로움이 부러웠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결국 이도 행복추구를 위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하는 짐작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라고 소리 내어 말할 수가 없다. 넘실거리는 평온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뭐든 성취해야 한다는 십수 년간의 교육과 그 이후로 내 삶을 지배한 경쟁적이었던 직장 생활 탓인지 '더 잘해야 돼!'라는 욕구가 행복감을 압도한다. 병이다. 조바심 병.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미술 교실 선생님에게 '몇 년 연습해야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더니 '만족이라는 건 없죠. 누구든 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낄 걸요?'라는 현명한 답변을 주었다. 만족이란 건 없다. 그런 게 있는 줄 알고 안 쉬고 일하고 돈도 모으고 집도 사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하지만 결국 즐길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 무엇도 지속되는 만족감을 선사하지 못한다. 엄마의 행복감은 그 부질없는 과정을 지나온 사람에게 온 선물 같은 것 아닐까. 엄마는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진정 엄마 레벨의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할 텐데,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기쁨만큼 잘 그리고 싶은 갈증이 정비례로 커지니 매일이 조바심치는 나날이 된다. 조바심병을 고칠 수 있는 날이 올까. 엄마의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라는 말을 읊조릴 날이 내게도 올까.



매거진의 이전글 인스타그램 중독자의 변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