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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Apr 22. 2021

죽음이 귀옆으로 육박해 온다.

길은 정해졌고 몸은 낡아간다.

죽음이 귀옆으로 육박해 오는 느낌을 나만 가진 것은 아니었나보다. 얼마전에 팟캐스트에서 유시민도 그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 본인은 마흔 살 즈음에 그런 걸 느꼈고, 그 옆의 다른 게스트는 쉰살 즈음에 느꼈다고 한다.


죽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는 자각은 내 육신이 늙어가면서 혹은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자라는 것 같다. 스무살, 그리고 서른살을 한참 넘겨서도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마흔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역동성이 감퇴하고 있다. 길은 정해졌고, 몸은 낡아간다. 몸을 달래가면서 써야 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아 가고 있다. 10년전에 10킬로를 달렸던 기억으로 어느 하루 무리를 하면 며칠은 자리보전을 해야 한다. 과식이나 폭식은 반드시 일주일 이내에 화를 부른다. 탄수화물의 과다 섭취는 건강검진에서 적신호로 나타난다. 과음은 안한지 오래다. 얼마 전에 감기증상으로 병원에 갔다가 혈압을 쟀는데 일생 처음으로 혈압이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생은 한 번 뿐이라 육신이 닳아 가는 과정도 몹시 새롭다. 해가 갈수록 이 늙음은 진도를 더해 갈 것이다. 내 부모님이 들으면 젊은게 엄살이라고 할 만한 소리지만.


몇 해 전에 시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새삼스레 죽음이 얼마나 코 앞에 다가와 있는지 깨달았다.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죽음이란 얼마나 구체적인 현상인지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할 기회가 되었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는 죽음은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 나오는 예쁜 주인공 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었는데 정작 내게 닥칠 죽음은 굉장히 구체적인 것이었다. 보통 죽음의 과정은 그걸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멜랑콜리해지기 쉽다. 하지만 죽는 당사자는 죽으면 끝이다. 정신적 육체적 활동이 정지되고 한줌의 재가 된다. 0이 된다. 암흑이 된다. 어쩌면 암흑조차도 없을 것이다. 암흑이라는 것도 감각기관이 있을 때 느끼는 것이다. 그게 나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참 망연하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때에도 죽음은 어딘가의 언저리에 몸을 도사리고 앉아있다. 언젠가는 죽는다. 이 모든 게 종료되고 나는 재가 된다.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걸 쓰기도 하고 그걸 잠깐 잊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걸 등에 짊어지고 사는 삶과 죽음 따위는 없는 것처럼 사는 삶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있다면 그건 내 남은 삶의 방향에 영향을 끼칠까? 앞으로 하게 될 의사 결정에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될까? 나는 그걸 더 적극적으로 얘기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없는 듯 감추고 살아야 하는 걸까?

요즘의 내 질문이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고 싶다면 방법은 많다. 주식, 비트코인, 돈벌이, 자식농사, 명품, 자동차, 부동산, 드라마, 정치인, 연예인 등에 대해 할 얘기는 차고 넘치는 모양이다. 바쁘고 바쁘다. 바쁘면 좋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코앞에 닥친 일이 많으면 죽음은 멀어 보인다.

어느 밤엔가,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말고(깊이 생각하고 앉았으면 두렵다. 검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동굴을 보는 느낌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그냥 기다리고 앉아 있는 건 왠지 내가 배운 내용에 위배 되는것 같지 않아? 횃불을 들고 검은 동굴 입구부터 둘러보자. 그런 생각은 글읽기를 처음 시작하던 때만큼이나 나를 초보로 돌려놓는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이다.

나는 사는 동안 뭘 하고 싶은거지? 하고 싶은 일은 있는 건가?

오랫동안 글을 쓰는 작가로 살고 싶었는데 그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긴 한가?

영화에서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은 죄다 가족의 가치를 최고로 치던데 정말 그런건가?(굉장히 의심스럽다)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세상 구경을 더해야 하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가?

아이같은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가?


인생 후반에 의외의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걸로 봐서는 나만 이런 생각에 골몰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언젠가 멈출 삶이기 때문에 더 충만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육박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 내려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나에게 좋은가를 생각하기로 한다. 남들이 해서 하는것 말고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영생을 보장하는 샘물이 있다면 마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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