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살던 집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거기서 십리도 넘게 가야 나오던 나의 국민학교는 아직 그대로 있다고 한다. 문득 떠오르는 달콤한 추억이 있다. 꿀을 먹은 기억이다. 꿀에 취했었는지 S자 모양으로 난 흙먼지 길을 따라 물음표처럼 작은 내가 혼자 걷는 장면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때 해마다 원주시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나갔었다. 교장선생님은 큰 교실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마지막 리허설을 했다.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 높여 부르짖을 순간이 클라이 맥스였고 그때 아이들은 이때다 싶은지 핑계 김에 박수를 치면서 까불어 대곤 했었다. 나를 취하게 했던 '꿀'은 웅변 연습을 할 때 교장 선생님이 한 숟갈씩 먹여 주시던 유일한 영양제였다. 교장 선생님은 꿀만 주신 것이 아니다. 내 기억에도 꿀을 발라 주셨다. 하늘색 원피스를 사서 내게 입히고 웅변대회에 데리고 나가셨건 것 같다. 하늘색 원피스가 얼마나 예뻤으면, 얼마나 좋았으면 모든 추억을 제쳐두고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도 그 교장 선생님의 이름도 기억을 못 하다니 죄송스럽다.
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 갑작스럽게 강원도 두메산골로 이사를 갔다. 이주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실패였다고 한다. 그곳은 원주에서도 몇 시간을 들어가는 곳이었다. 처음 등교했을 때 초록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유리창의 창문에 조밀 조밀하게 붙어있었던 까만 눈동자들이 생각난다. 하얀 얼굴에 허리까지 오던 검은 머리카락을 출렁이던 하얀 얼굴의 '나'는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같았다. 감히 그곳에 굴러 들어간 덕분에 나는 과격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쌓일 때마다 버렸고 절대 재활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이 먹여 주시던 꿀과 사 주셨던 하늘색 원피스가 있었다. 축복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매일 전투하듯 작은 산의 장자울 고개를 뛰어넘어 '면'에 있던 중학교 다녔었다. 학교에 도착해보면 도시락은 비빔밥처럼 섞여 있었다. 여름에 아침이슬을 맞은 운동화에서는 쩔꺽 쩔꺽 물이 밟혔고 교복 치마를 꼭 짜면 물이 줄 줄 흘렀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체온에 말랐는지 치마 끝만 젖어 있었다. 장마가 지면 개울에 있던 외나무다리가 떠내려 갔다. 그럴 때에는 집에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가끔 우리는'전투'라는 인기 드라마에서 나오던 병사들처럼 물이 가슴까지 찰랑이던 때에 그 개울을 건너기도 했다. 가방은 소총을 들듯 두 양팔로 받쳐 들고 하나둘씩 건넸는데 내 동생 둘은 물에 휩쓸려 거의 떠내려 갈 뻔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기억을 못 한다. 기억에서 지웠었나 보다.
우리가 청소년기를 나던 강원도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일주일에 한번 전교생이 동태처럼 얼어 붙었던 운동장 조회시간이 떠오른다. 요즘 세상에서 남극의 펭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때의 우리가 생각난다. 하얀 카라를 단 검은 교복의 우리들이 덜덜 떨던 모습은 그 영상 속의 펭귄을 닮아 있었다. 혹독 한 추위에 펭귄은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라도 했지만 우리들은 팔 벌려 넓이로 있어야 했기에 서로를 의지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등을 돌려 칼바람에 방패를 만들었다가도 몇 초 후면 돌아서야 했다. 언발을 동동 구르며 시계의 초침을 세듯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곧 교복 자율화가 도입되면서 남극의 펭귄 신세는 벗어 났다. 그때 그런 추위를 견디면서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다만 얼음이 언 것처럼 얼얼하던 빨간 얼굴에 손바닥 을 비비며 열을 내던 나와 친구들의 모습만이 쨍쨍하게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늦게 까지 자율학습을 하다 보면 밤이 되었다. 밤에 공동묘지를 지날 때 나무에 걸린 비닐이 귀신처럼 보여 가슴이 철렁할 때가 많았다. 앞보다는 뒤가 더 무서워서 지금은 아저씨가 된 이종사촌을 뒤에 두면 안심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동생들을 데리고 '면'소재지인 학교 옆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자울 고개를 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날아갈 것 같았다. 자상하던 학교 소사 아저씨의 사랑채 방을 빌려 곤로에 밥을 해 먹으면서 다녔었다. 그렇게 '면'소재지로 나와 살면서도 어떠한 미래를 꿈꾸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배웠고 그때 우리의 구호는 "4당 5 락"이었다. '4당 5 락'의 구호를 외치며 어찌어찌 대학을 갔고 벼르고 벼르던 탈출을 했다.
바람이 불면 학교의 흙먼지 운동장에 생기던 회오리바람을 보러 가고 싶다. 그 회오리바람이 서러웠던 장면들을 모두 날려 버려 줄 것 같다. 첩첩산중이었던 그곳을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그곳과 닮은 숲만 보면 뛰어 들어가 엉뚱한 곳에서 그곳을 찾는다.
얼마 전 그곳에 열차가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벼르지 않아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넘어 다니던 장자울 고갯길로는 더 이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등산가방을 메고 넘어가 찾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 고개 넘어 있던 집, 거기서 내 친구 춘자가 툭 터진 찰옥시기를 쪄서 아직도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떠났던 춘자의 하얗고 반질 반질했던 손바닥이 보고 싶다. 춘자랑 나랑 베스트 프렌드라는 것을 알던 국민 학교때 교장 선생님이 "자, 아 해봐" 하시면서 꿀 한 숟가락 들고 우리를 기다리실 것 같다. 우리가 감사하다는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 교장 선생님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