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자주적인 인생
후회는 9999999999번으로 충분하다
by 스토리텔러 레이첼 Oct 26. 2021
평생을 걸쳐 자기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한 소설 속의 주인공 '백치 아다다와, 벙어리 삼룡이'를 만난 것은 가을이 막 깊어 가던 10월 초였다. 왜 그리 아다다와 삼룡이가 애처롭고 딱하던지 내내 생각이 난다. 마치 내 형제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긴 날숨보다는 들숨을 쉴 때에 마치 울다가 지친 아이처럼 깊은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아마도 내 속에도 그들처럼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위로받지 못한 '울고 싶은 자아'가 있는 모양이다.
철저하게 '역할' 그 자체로만 대해지던 가엾은 그들이었다. 만약 말을 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현대인들 역시 속으로는 울고 싶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행복해지라고 울지 말라고 다그치기에 어디 가서 마음 놓고 울 곳도 없기도 하다. 웃거나 울고 싶은 공간은 혼자만의 시간에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늘 역할에 빠져 그 연장 선상에서 노심초사하며 살았던 것 같다. 부모 역할, 자녀 역할 등 왜 그리 주어진 역할이 많으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없어서 마치 역할 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갑옷을 입고 칼과 방패를 차고는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갑옷을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무기들 때문인지 여기저기 상처가 난 것도 모르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뿐인가 철커덩 거리며 소리를 내던 무기들의 부딪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내면에 깊이 깔려 있다.
엄마로 살아가는 것 역시 장군이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수시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는 방패, 그리고 앞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막아내는 용감한 잔다르크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엄마였던 것 같다. 그러한 위협이 현실에서 눈에 보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추측된, 즉 스스로가 만들어낸 불안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 같은 존재일 경우가 많았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다칠까 봐, 어떻게 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살았는지 어깨엔 마치 콘크리트를 친 것처럼 단단한 겹이 생긴 것 같다. 괴물 같았던 불안을 쳐내려고 허공에 대고 화살을 쏘고 칼날을 휘둘렀다. 장정 같은 불안한 존재가 다가와 자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뒤로두고 방패처럼 나를 내민 적도 있었다.
휴우,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아이들을 키웠다. 이역만리에서 늘 집을 비우며 일을 해야 했던 남편은 딱 거기서 거기까지만 집안일을 걱정하도록 했다. 일도 힘든데 집안일까지 힘들게 하다니 그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과도하게 힘이 빠졌고 바람이 빠진 풍선보다도 더 쪼글 해진 모습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려움을 같이 나누지 않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혼자서 가진 경험을 가지고 남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오산이다. 그런 쓸쓸한 경험의 시간 때문에 가을바람이 더 스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호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하면서 말이다. 세상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조차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을바람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 같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슬퍼야 할까? 활짝 피지도 못하고 (활짝 피는 것이 무엇이길래) 엄마로서 아내로서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이 자꾸 들 때 그런 생각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 본다.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끝도 없이 자꾸 여기저기에 섭섭해지는 통에 마음 다스리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냥 한 그루의 나무처럼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낙엽으로 지면서 그렇게 세상을 살다 가는 것 자체, 존재 그 자체로 꽤 괜찮었었다는 것에 충분히 감사하면 왜 안되는지 자꾸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존재했던 공간과 시간은 영원히 남아 있을 텐데, 나 자신에게 그런데 뭐가 그리 아쉬우냐고, 필요하냐고, 박수가 그렇게 그리운가 묻고 싶은 것이다. 비록 철갑옷을 입고 뛰어다녔고 여기저기 멍든 상처가 남아 있기는 해도 삶을 살아냈다는 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갈무리할 수 있을 만큼 자라려면 과연 몇 살이나 되어야 할까 싶다.
그렇게 마음이 붕 뜰 때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밀감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는 친밀감 말이다. 뭔가가 아쉬울 때 가을바람이 쌩하고 불며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가슴속 상처 어느 구석을 건드릴 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차가워진 손을 비벼줄 그런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역할에 충실하느라 오늘도 내일도 서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하여 진정 그 사람과 사람대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시간이다. 친밀감에 대한 욕구조차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꾼 정신으로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타인에게도 똑같은 줄자를 들이대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들은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본받으라며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새 멀리 달아나 버리는 아이들이 있다면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은 때로는 그것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에게 큰 억압이 되기도 한다. 어긋나지 않는 생산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사실 자신이 해 온 것 같은 '일꾼'같은 의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저편에는 일꾼처럼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시절에 대한 회한이 있기 때문이다. 바통 터치를 멋지게 하고 은퇴하여 더 이상 그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싶은 것인데 그 바통을 터치한 자식들이 같은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정말 당연할까? 자신의 노동자와도 같았던 일꾼 의식을 전수하려는 경우에도?
그러한 기대가 쉽게 깨어지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세월이 가다보면 그런 일들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말이다. 정말 가족들이 어떠한 삶을 살든 그저 응원할 수가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여기저기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요즘은 정말 예전과 다르게 어떻게 살아야, 어느 방향으로 가야 디지털 미래 시대에 잘 먹고살 수 있는지를 점치기가 어려운 세대가 되었다. 이러한 전후무후하게 막연한 시대에 가족들과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밀하게 지내지 않고는 어디 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싶다.
역할만 기대하는 가족 사이의 관계는 진정한 한 사람대 한 사람의 관계로서의 친밀감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한다는 이중 메시지는 가족들 사이를 진정으로 가깝게 하지 못하게 한다. 더군다나 그 기대가 온전히 역할만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역할만 잘하는 가족들끼리 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가족은 안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 같다.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는 절대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게 만드는 것은 SNS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이렇게 사는 것이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잘 나갈 때에는 자주 연락을 하다가도 힘들 때에는 두더지가 땅 속에 숨어 버리듯 그렇게 숨을 수밖에 없다.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은 필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되어가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의 기준, 행복의 기준이 언제 이렇게 뭐든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일까? 행복하려면 잘 나가야 하는 것인가 싶다.
조금만 벌어서 조금씩만 먹고살아도 되고, 비교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좋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어려운 경쟁사회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할까 봐 밤낮을 고민하며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시달림에 스스로 지쳐 버렸다. 옆에 사람보다 더 많아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습 된 '행복 공식'을 바꾸어 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게 주어진 모든 교육과 경험이라는 자루에 든 내용물들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보고 싶다. 그렇게 행복이라는 것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주적으로 살아보고 싶다. 가을엔 바바리코트와 스카프 한 장으로도 만족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바닷가에 노을이 지면 너무도 쓸쓸해 노을을 뒤로하고 달아난 적이 있다. 그것은 '아직 나와도 친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거다'라고 생각한다. "너 스스로 너의 손을 잡고 붉은 단풍이 지는 가로수길을 저녁놀이 지는 시간에도 뿌듯하게 걸어갈 만큼' 너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자꾸 너의 발목을 붙잡는 지난 실수들, 후회들, 그런 지난 일에 대해 더 이상 잘했고 못했고를 계산하지 말고,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고 말이다. 그런 생각들 999번, 아니 9999번, 아니 99999번 후회했으면 충분하지 않니."
가을볕에 마른 나뭇가지들이 각자의 빛깔, 오렌지, 노랑, 빨강 빛 등으로 빛나다가 결국은 땅에 떨어진다. 그 빛깔 중에 빛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나 말이다. 어떻게 살아왔던 중요하지가 않다. 모두가 삶 가운데 바람을 맞고 빛을 쬐며 나름 피었다가 지는 존재다. 그렇게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도록 하자. 빨갛게 시선을 끄는 단풍나무도 예쁘지만 가을에도 벚꽃나무 이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차렸으면 그만 되었다. 이제 그만 그러자. 이제 그런 말도 안 되는 불행한 것들 (자책, 죄책감, 불안 따위들)에 의존하지 말고 충분히 자주적으로 살아 보자. 수 많은 스토리 중의 한 스토리, 더군다나 그 스토리의 주인으로 살았다면 충분하다. 더 이상 자주적인 삶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