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들어 갑작스럽게 만남이 세 번이나 있었다.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피차 집에 칩거했고 그러다 보니 온라인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번 주 세 번의 만남, 한 번은 둘이서 두 번은 셋이서 만났다. 당연히 둘이서 만났을 때에는 서로에게 집중하며 온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셋이 있었을 때에는....
아무래도 훨씬 더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그리고 나눈 경우가 훨씬 더 소통이 잘 되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친구들이 둘이서 신나게 대화 중일 때, 마치 어린아이가 "나도 나도" 하면서 손들고 끼어드는 것처럼 그 새를 못 참고 첨벙 대화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물어보지도 않는 나의 안부를 마구 쏟아 냈다. 말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고나 싶어 했을까 내 안부를? 철없게도 마치 사춘기의 아이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던 내 모습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그 이상이 아니었다. 설레며 기다렸던 시간, 조용히 묵묵하게 들어주는 것이 힘들었나 보다.
그때 나는 조급했다. 소외되는 것 같았나 보다. 열심히 대화에 참여했건만 돌아오면서 겉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만나면 관심사가 같았기에 마치 장작을 태우듯이 화제를 활 활 태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못 보던 사이에 우리들의 시간은 각자의 시곗바늘과만 친했던 것이다.
섭섭한 마음은 낯설지가 않다. 예전에는 수없이 느꼈던 감정인데도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나를 수시로 돌아본다. 내 삶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수시로 드는 오지랖 없는 섭섭한 마음, 이러한 감정이 당황스럽다. 김치와 깻잎조림을 바리바리 싸주었던 아는 동생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집에까지 불러 집 밥을 지어 배부른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스타벅스 커피며 배 한 박스 사들고 와준 선배 언니는 또 어떤가, 어제의 대화는 감사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섭섭했다니 지금은 감사를 선택했으므로 울컥해진다. 섭섭하고 슬펐던 마음은 그때 마침 내리는 빗줄기 때문이었던가 싶다. 비가 너무 부슬부슬 내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비 때문이라고....
서로 죽자 사자 하던 연인들도 어느 시점이 되면 서로의 성격차이로 만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과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감사하는 태도를 더 선택하도록 해야겠다. 경청하고 감사하는 태도는 평생 배워야 하는 학습인 것 같다.
가끔씩이라도 가족들과 한 명씩 따로따로 만나 외식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그럴 때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모르던 친밀함이 느껴진다. 여럿을 함께 기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하게 된 차별을 통해 상처를 입었을 아이들, 특히 늦둥이를 낳으면서 큰 아이들이 청소년기를 보낼 때 그 시간을 돌보지 못했던 것이 절절하게 안타깝다. 첫 번째로 하던 부모 노릇에 너무도 서툴렀고 그리고 실수했던 시간들은 무심하게 멀어져 이제 과거로만 존재한다. 성인이 되어 개별적인 인간으로 내게 다가오지만 아직도 나에겐 아기 같은 다 큰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 필름을 돌리듯 자꾸 떠오르는 장면들은 잘한 것보다는 잘못했던 한 컷 한 컷들이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이제부터의 시간에 더 충실하고자 한다. 둘이던 셋이던 만남을 가질 때 잘 듣고,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감사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느새 섭섭한 마음이 다가와 온통 마음의 평정 상태를 흐트러지게 한다. 감사도 학습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쁘고 어리숙했던 시간을 보냈던 것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이 가을이 저물어 간다. 붉은 단풍과 누런 호박이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 유별스럽게 아름다운 가을이다. 따뜻한 햇살이 양떼구름을 몰고 푸른 하늘에서 산책을 한다. 온전한 은혜가 풍성하게 느껴지는 가을날을 매일 감사함으로 마무리하자.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