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텔레파시가 통했나 보다. 눈을 뜨자마자 푸른 새벽의 허공을 청아한 소리가가른다. 모두가 잠이 든 새벽을 정복하는 소리다. 가끔은 의식의 바깥인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싶어 눈을 비빈다. 다행스럽게도 꿈이 아닌 현실이다. 너는 분명 단풍나무 위에서 목청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단풍나무 싹은 처음엔 빨간색이었다가 오렌지색에서 연초록으로 변한다. 카멜레온이 따로 없다.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비밀스러운 시크릿을 서로 나누는 사이, 단풍나무와 청아한 새, 그들의 아침에 나도 끼어든다.
차일피일 미루던 꽃구경에 나섰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니 아니나 다를까 스프링 페스티벌이한창이다. 분홍 꽃구름이 꽃나무 가지마다 뭉게뭉게 걸려 바람에 살랑거린다. 지나가던 여자가 꽃나무 아래 담요를 깔고 앉는다. 체크무늬 남방셔츠를 입은 여자가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 뭐라고 피사체에 말을 건넨다. 봄 같은 피사체랑 가을 같은 체크무늬 여자가 서로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벚꽃나무 가지를 붙잡고나도 피사체가 되었다. 어정쩡하게 웃었는데"이쁘다"며 호들갑을떠는 딸에게 물었다. "나도 꽃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꽃이 될 수 있을까?" 그저 웃는다. 그런 너의 웃음이 나에게 기쁨이라는 것을 알까? 떨어진 꽃잎을 주워 들고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보았다. 촉촉했다. 볼에도 대어보고 코로 냄새도 맡아보았다. 갑자기 생각나는 시가 있었다. 꽃잎을 하나하나 헨젤과 그레델처럼 길에 떨어 뜨리면서 읊조렸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그런 시가 있었어요?" 놀라는 딸이 또 웃었다. 이 꽃을 어떻게 즈려 밟으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싶었나보다.
꽃을 만질 수 있음. 지나가는 개와 눈이 마주침.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남.
나 서 있네. 나 걷고 있네. 나 웃고 있네. 나 꽃을 바라보네. 그 꽃이 떨어지네. 떨어진 꽃잎이 나 같네. 떨어진 꽃잎도 아름답네. 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네.그날이 오늘이네.
2021년 봄은 특별했다. 영원히 기억에 남을 봄소풍 같았다. 엉킨 실타래 같은 이야기 뭉치 속에서 하나씩 쏙쏙 뽑아 글을 만들었다. 재료를 다듬고 씻었다. 양념도 쳤다. 나만의 공간에 페인트칠을 하고 그림도 몇 점 걸고 의자와테이블을 놓은 별장을 지어 그 글들을 전시했다. 가끔 알다가도 모를 재료를 볼 때에는만지지 못하고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배짱이 더 생기면 괜찮을까? 다시 곳간에 하얀 천을 덮어 파묻어 두었다.
글은 용감한 사람이 쓰는 것 같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할 수 없는데 모르는 게 많다. 이거 빼고 저거 빼다 보니 알맹이가 없어져 재미가 준다. 달라지고 싶어 시작했던 글쓰기였다. 그러나 요령을 부리면 달라지기 힘들 것이다. 예전처럼 컴포트 존에서만 머물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글을 쓰다 보면 손가락의 힘도 세질 것이다. 빙산의 일각 같은 무의식에도 기댈 것 같다.
진화하려는 몸부림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이전의 나와는 다른 새벽의 새소리를 닮은 글을 쓰고 싶다. 새벽에울던 그 작은 새 한 마리의 쩌렁쩌렁한 목청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나의 의식도깨울만큼 우렁찼다.
2021년 봄에는 꽃망울이 터지듯 나도 만개했다.내일이 중요했던 내가, 어제를 위해 오늘을 잊던 내가, 올봄에는 오늘을 알뜰하게 살았다.글이 있는 인생은 언제나 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