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지는 영화 마을

밴쿠버, 포트랭리


자주 가는 곳이 있다. Fort Langley라는 곳인데 Cemetery라고 하는 공원묘지가 마을의 중앙에 있다. 미국과의 국경이 30분 내외라 관광객들이 자주 오는 곳이다. 딸의 운전 연수 겸해서 지나다가 들렀는데 마침 영화 촬영 장비인 탱크, 헬기 등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가던 모습은 검은 제복을 입은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촬영이 끝났는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 아쉬웠다.



Fraser River 강변도로 드라이브를 포기하고 영화 세트장 주변에서 맴돌기로 했다. 누가 아니랄까 봐 딸도 나도 신이 나 있었다. 이렇게 마음 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었다. 사춘기 소녀답게 무엇을 해도 시답지 않아 하는데 이 영화 세트장을 보고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못 보던 건물도 세트장으로 쓰려고 했는지 공터에 급조해 놓았고 거리에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세밀하게 우체통까지도 United States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화 속 마을을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에 잡힐 만한 구석을 모두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시청도 Green Hills Town Hall이라고 바꾸어 놓았다. 이 시청은 영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코로나로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이 폐쇄된 지 오래다. 갑자기 장난기가 느껴져 미국에 다녀온 것처럼 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냈다. 우리 식구들만 속아 주는 척했다.


이곳은 로키에서부터 내려오는 Fraser River가 유유히 흐르는 항구마을이다. Fraser River를 통해 모피 무역을 하던 곳이라 집도 옛날에 지어진 것이 많다. 역사와 전통이 길지 않은 캐나다의 마을 중에서는 가장 예스럽고 분위기가 있는 곳이라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고 특별히 갈 곳이 마땅치 않을 때 들르는 곳이다.



우리가 본 영화 세트장은 Sonic이라는 영화촬영을 하며 짐 캐리가 주연이라고 한다. 촬영 스텝이 알려 주지 않았지만, Green Hills라는 정보로 찾아보니 그런 지명은 없고 Sonic 영화에서 쓰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혹시 짐 캐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음날 오전에도 들러 보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거리의 군 장비들은 철거되고 스태프들만 있었다. 야외촬영 일정은 다운타운과 내가 들른 이곳 등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두 번이나 찾아온 나, 영화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침나절, 흐린 하늘 아래에도 걷고 싶어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저어기 핑크빛 벚꽃 가로수길이 특별히 눈에 들어와 끌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공원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길옆 어느 묘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가 40세가 채 되지 않아 운명한 것으로 보였다. 아직은 살아 있는 나와 그녀가 한 공간에 있었다. 걷는데 내내 그녀의 말이 따라다녔다.



누군가를 보낸다는 것은 그리움 때문에 힘든 것 같다. 슬픔은 감당할 수 있어도 사무치는 그리움은 어쩌란 말인가. 두고 떠나가는 사람도 자신을 그리워할 사람들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나도 수없이 많은 시간을 내가 먼저 떠나는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고 그때마다 나를 그리워할 내 가족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새로운 안녕'이라는 애도 기법이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냈을 때 억지로 잊으려고 하는 것보다 충분히 애도하면서 떠난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통곡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는 그때만 우셨다. 엄마와 우리들 모두 아버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불문율이 있었던 것처럼 억지로 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수십 년이 지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후에야 앨범 속의 아버지와 '새로운 안녕'을 하며 진심으로 보내드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잊으려 애쓰느라 잊은 그리움을 되찾고 싶다.


Fort Langley는 살고 지는 것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공원묘지 주변에는 집들이 많이 있다. 바로 길 건너 묘지가 있는 집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공원 옆 주민들의 일상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날마다 '오늘은 어떻게 살까 내일은 어떻게 살까?'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나다. 그날의 To do list를 성취했을 때 크로스 마크를 하는 것보다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 모든 것들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게 된다. 모든 것들이 마치 멀리서 카메라로 찍는 듯 전인적인 관점에서 보인다. 그러므로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이곳처럼 진실하게 내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해 주는 곳은 없다. 공원묘지를 중앙에 둔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서너 개가 있었고 그중 두 개는 공원묘지 바로 옆에 있었다.



공원묘지 바로 옆 거리에 앤티크 가게, 빵과 커피를 파는 가게, 캔디 가게, 모자 가게 등이 있다. 커피를 손에 든 사람, 반려견을 곁에 두고 걷는 사람도 있다. 걷다 보니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너른 강가에 노인들이 떨어져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서로를 잘 아는 듯 이름을 불러가면서 다정하게 굴었다. 그중 한 분은 빨간 스포츠카의 주인이다. 탐스러운 꽃을 품은 집을 찍고 있을 때 곁을 지나길래 빨간색에 이끌려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다시 만났다. 열심히 산 것이 분명한 그 어른이 그분들 중 누구일까 가늠해 보았다. 이분일까 저분일까, 그중 볼록 렌즈처럼 튀어나오는 분이 계셨다. 아마 그분일 것이다. 목소리가 좋았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비비안 리)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희망도 있지만 동시에 쓸쓸함도 깃들어 있다. 그녀가 클라크 케이블 떠나보내며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녀는 떠난 사람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슬픔보다 더 슬픈 그리움을 견뎠을 그녀였다. 그리움을 견디는 것이 슬픔을 견디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Fort Langley 영화마을에서 홀로 걷다 보니 문득 나도 카메라 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인공인 영화, 그 영화의 끝은 어떨까? 어떤 영화든 The End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유일하게 다 아는 진실일 것이다. 내 삶에 대한 진실을 만나러 영화마을인 Fort Langley에 자주 들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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