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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Mar 22. 2023

늙는다고 말하지 말 것

인생을 가꾸고 다듬는 시간


예전엔 미처 몰랐다. 늙는다는 말이 얼마나 늙은 말인지... 이럴 줄 알았으면 늙는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늙는다고 했을 때 늙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말로 규정해 버린 시간들, 다른 말도 있었을 텐데...

 

늙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본다. 늙는다는 것이 '모든 것에 익숙하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본다. 이제 내가 해보지 않던 새로운 전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가장으로 살던 남편은 용병을 몇 명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가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역할을 했다면 아내였던 나는 수만의 용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주방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셰프였다. 전장으로 나갔던 늙은 용사는 이제 지쳐서 주방에 있던 셰프가 뭔가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다. 수만의 용사들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느라 지친 것은 매한가지만 이제 주방에서 남몰래 칼을 갈던 여 셰프는 드디어 프라이팬을 바닥에 뎅강 집어던지며 전장으로 나가보자고 한다. 하지만 막사를 나가자마자 막막하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셰프는 이미 많다고 한다. 공중에서 프라이팬 돌리기라도 하면 모를까 어느새 쓸모 없어진 느낌, 그럴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아, 그대들이여, 밥통에 영혼이 있다던데 꼭 우리를 기억해주오."  셰프가 만든 음식의 개수는 셀 수가 없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한가지만 하고 살아 '자격 미달' 자격이 되었다. 기다리는 용사들은 안 오는데 삼식 씨 한분만 남아서 '내게 영혼을 다오' 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보니 나온 이야기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독립해 나가고 나니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아득했다. 공원과 수영장에 가고 지인들과 좋은 시간도 충분히 가졌다. 때로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러 쇼핑센터에 가서 몇 개 골라잡고는 결국 후회를 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평생 가족들을 위해 어깨에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짐을 지고 있는 가장의 한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여기까지 만이라고 주부의 한계를 그어놓은 것이 누구냐고 따질 겨를도 없다. 가정주부로서 월급을 받았다면 (국가에서?) 그 화려한 경력을 이력서에 쓸 수 있을까? 가정주부가 하는 일은 그 범위가 방대하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위생병, 취사병, 전방 보초병 등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군인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이력서에 쓰지도 못하고 월급도 못 받은 일을 하고서도 그저 의미에만 의미를 두려고 한다. 그런 의미라면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해 오던 대로 해내며 내적으로 일어나는 반란을 조용히 잠재우려 했었다.


하지만 웬걸, 그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인간의 수명은 수십 년이 는다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예전의 어머니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보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아 슬그머니 수면으로 떠오르는 이 호기심을 어쩔 것인가 말이다. 호르몬 탓만 할 수는 없다. 코로나 이후 읽은 책들을 정리해 놓은 노트만 서너 권이고 컴퓨터에는 언제 그렇게 썼나 싶게 글도 많다. 또 그동안 만들어 놓은 PPT를 보면 이런 열정을 가진 나에게 스스로 놀란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인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자료를 모으고 있는가? 그리고 왜 나누려고 하는가?


최근에 나는 밴쿠버에서 Social Club을 운영 중이다. Online Reading Club을 하려다가 조금은 재미있고 역동적인 요소를 넣어 진행한다. 스트레스와 셀프케어에 대해서 진행할 때 호흡 및 명상과 PPT로 진행을 하기도 하지만 팝송을 배우기도 한다. 처음에는 독서모임처럼 인지적인 내용에 집중하자고 했지만 노년에 접어든 나의 클라이언트들은 다르다. 팝송의 가사 한 곡 온전하게 부르지 못한 세대이기도 하다. 모두들 하는 것마다 새롭다고 한다. 건강을 위한 루틴을 설정하고 수영장에서도 만난다. 의미가 있는 우리끼리의 리추얼도 있다. 우리들만 특별하고 유일한 시간이다.


뜻밖의 변화, 새로운 변화가 반갑다. 누가 가르친다 할 것도 없다. 서로가 스승이다. 함께 만들어 가는 스토리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가 몇 달 후 아니 1년 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 올정도로 많이 아프면서도 더 나누어주려는 나의 특별한 고객, 언니를 많이 웃게 해 드릴 것이라고 결심한다.  나의 클라이언트들은 모두 가장 가깝던 지인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최선의 세상을 만들고 싶은 여전사들. 실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 보면 패거리에 속한 것처럼 어깨가 올라간다. 새로워지는 자신들의 모습이 기쁜 언니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생각하니 몇 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내가 책을 읽지 않고 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동안 읽었던 책이 내가 창문을 열 수 있도록 발돋움이 되어 주었다. 한 권 한 권 책이 쌓일 때마다 그 책을 밟고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어 갔다. 남편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읽은 책 보다 올해 들어 읽은 책의 권수가 더 많다고 한다. 그가 책을 읽을 때 가슴 위에는 고양이가 철퍼덕 퍼져 잠을 잔다.


정여울 작가의 '늘 괜찮다고 말하는 당신에게'를 읽으며 적어 놓은 노트 글을 일부 옮긴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야무지게 잘 쓰는지, 늘 하던 대로 책의 많은 부분을 필사했다. 아끼고 또 아끼며 자주 읽어 보아야겠다. 내일은 또 어떤 시간을 만나게 될까? 인생을 가꾸고 다듬을 시간은 늘 앞에 있다.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두니까 새로운 것들이 드러난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중년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내 눈에 비친 중년은 ‘인생의 향방’을 바꾸기 위해 가장 적절한 시기다. 특히 잘못된 인생행로를 완전히 급선회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바로 중년이다. 노년에도 물론 향방을 바꿀 수 있지만 체력적인 면이라든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년기에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성숙하고 몸도 여전히 팔팔하다. 중년은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기다. 내가 무엇을 잘 해내고 무엇을 잘 못하는지를 안다. 절망이 무엇인지 알고 희로애락의 극단도 경험했으며 게다가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본 적이 있는 중년이라면 더욱 ‘인생의 방향’을 가꿀 기회가 많다.


창조적인 사람은 ‘익숙한 모든 것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나, 가족, 공간, 사회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 동시에 창의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중년의 위기를 창조성의 원천으로 바꿀 수 있는 최고의 비법은 바로 세상에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담력이다. 자신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완전히 내던질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인생 제2 막을 시작하는 힘이다.


융은 ‘기억, 꿈, 사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면의 형상을 찾던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야말로 중요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청년기가 사회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외적인 형상을 찾아가는 시간이라면 중년기는 자신의 삶에서 내면의 형상을 찾아가는 시기다. 이것을 찾는데 실패하면 삶은 세속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이득만을 향해 치닫거나 돌이킬 수 없는 타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 닥칠 중년기에는 봉인의 시기가 필요하다. 사회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긴장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익숙한 공간, 한정된 시간, 지금까지 나다운 것이라고 믿어왔던 세계의 매트릭스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벗어나야 한다, 가능하다면 정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시간을 짧게라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조직 사회나 자본의 톱니바퀴가 굴리는 대로 굴러가거나 가족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진정한 나를 찾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창조성’의 비밀을 혼자 있을 수 있는 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직 이곳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에서 찾았다. 매슬로는 ‘인간 본성의 탐구’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조적 열정을 지닌 사람은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잊고 오직 그 순간에만 몰두한다고, 자신에게서조차 벗어날 수 있는 사람, 공간과 사회와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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