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그것도 콤플렉스였다. 가장 친하던 친구는 멋진 남자아이랑 썸을 타는 중이었는데 나는 둘이 데이트를 할 때 아이스크림을 배달하던 향단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물론 호감을 보여주던 남자아이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교련시간에 총검 훈련을 할 때 혼자서 다른 방향으로 찔러대던 방향감각이 더딘 아이였다. 새들도 자기 짝을 찾을 때에는 명백하게 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날개를 가진 새를 간택한다. 하물며 청소년적인 인간이었는데 무의식중에도 상대방의 명석한 두뇌와 센스를 저울질했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마디로 그 아이의 여자친구가 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창조적인 독특한 성품의 아이였는데 타칭 그리고 자칭 모범생의 루틴을 가지고 살던 내게 그 아이는 하는 짓마다 기대에 어긋났다.
그 아이가 산 넘고 물 건너 몇십 리 길을 걸어와서 우리 동네, 지르너미에 왔던 적이 있다. 먼 길에 얼마나 땀을 빼고 왔는지 지쳐 보였고 목이 마르다고 했다. 동네 짓궂은 사촌이 그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실실 웃으며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토지의 서희처럼 나는 뭔가 차가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했다.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동네에 소문이 나기 딱 좋았다. 나는 그 아이의 동태를 구멍 뚫린 창호지 사이로 살펴보았다. 그 아이는 휘적 휘적 딴청도 부리다가 먼 산도 바라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주면서 '그만 이곳을 떠나라'라고 쌀쌀맞게 소리 질렀다. 그 순간에도 논밭에서 일하는 엄마와 아빠를 위해 허튼짓을 하는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하고픈 말이 구구절절했을 터인데 나의 쌀쌀맞은 표정과 말투에 그 아이는 먼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고 뭐 그 나이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말이다. 왜 그렇게 나에게 찾아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원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냉수 먹고 속을 차렸는지 그 이후 그 아이는 나에게서 마음을 거두어갔다. 하지만 가끔 복도에서 지날 때 건들거리면서 슬쩍 내 어깨에 부딪치며 심술도 부렸다. 사실 그때 '잘 가'라며 조금은 살갑게 굴까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을 내놓고 한마디 '잘 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마도 냉큼 사귀자고 할까 봐였다. 무엇보다도 질색한 것은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형이나 아버지의 애장품으로 보이던 분홍빛으로 번쩍이던 비단 같은 셔츠를 빼입고 왔었는데 단추가 엇박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단추까지 잘 못 끼고 온 그 아이의 센스가 싫었다. 지금은 셔츠 단추를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 가끔 그 핑크 비단 셔츠가 생각난다. 아마도 야무진 부인을 만나 바가지 긁히며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여름에 대한 재미있는 추억을 떠 올리려 해도 농사일을 돕던 재미없는 생각이 난다. 방학이란 부지런히 농사일을 돕는 날들의 집합이었고 그러므로 방학이 그리 반가운 시간은 아니었다. 한참 농사일이 바쁠 때 새참으로 국수를 삶아 머리에 이고 콩이 드문드문 심어진 논둑길을 넘어질세라 걸어가곤 했다. 찰랑찰랑 국수물이 얼굴에 떨어지던 순간, 나는 머리에 인 함지박을 다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던 아주 작은 동네는 달아나고 싶을 만큼 작고 답답했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서울이 내가 살아야 할 곳 같았기에 늘 떠나는 상상을 하면서 정을 붙이지 못했다. 막걸리 한 잔에 힘을 얻어 일을 하는 아버지와 얼굴 볼새도 없이 들에서 바쁜 어머니를 생각하며 성공이 뭔지도 모르며 벼르곤 했다. 하루하루 손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나의 시골생활을 청산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는 어떠한 욕구가 올라와 울컥해도 꿀꺽 삼켜야 했다.
대학교에 간다는 목표가 생겼다. 시골 학교에서 몇 순위에 들던 모범생이었기에 나는 수도권 대학에 기어코 합격 시키겠다던 진학 담당 선생님의 집중적인 케어를 받았다. 체력이 약해 두 배 세배로 노력해야 했건만 책을 들면 잠이 오기 일수였고 교과서에 침을 흘리며 엎드려 음냐 음냐 꿀잠을 자곤 했다. 꿈이 크면 일상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독기도 부려야 하는데 태생대로 시간을 물렁 물렁하게 흘러 보냈다. 간절한 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고 3 때 내게 의미 있는 눈빛을 한 아이가 다가왔다.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그 아이의 동생이 나를 많이 따르더니 자신의 형을 소개해 준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한눈에 보아도 분홍 셔츠와는 차원이 다른 센스를 가진 면 소재지 마을의 유지, 만물상 집의 아들이었다.
몇 장면이 어슴푸레 생각이 난다. 시골학교지만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내가 고3이던 때에 그 아이는 시력이 안 좋아 육군 사관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져 재수를 하던 중 집으로 내려와 쉬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침 이면 학교의 테니스장에 나와서 운동을 하던 멋진 아이였다. 나는 그때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 소사 아저씨의 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십오 리가 넘는 시골집을 탈출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고3 수험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에 밥을 지으려면 쌀을 씻어야 했는데 마당에 있던 펌프에서 물을 푸다가도 바로 옆 건물인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등교 준비에도 바빴을 텐데 틈틈이 쌀이 담긴 양은그릇에 양손에 들고 밥할 생각을 잊은 채 학교 건물 뒤에 숨어 운동장에 있던 그 아이를 훔쳐보곤 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테니스를 했다. 그때 내 심장의 뜨거운 고동소리가 건물까지 진동하게 할 만큼 둥둥거렸다. 심장이 뛴다는 것의 의미를 그때 처음 알았을 것이다.
전도유망한 고3 여학생의 위기였다. 그 아이는 아무도 없는 학교의 운동장에서 오토바이를 어떻게 타는지 알려주고 나를 태워 몇 바퀴 운동장을 돌기도 했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 아이를 만날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오리무중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어둑어둑할 때 학교 운동장의 벤치에 둘이 멀찌감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 번쩍 플래시가 우리의 얼굴을 비추고는 사라졌다. 가슴에 철썩 방파제에 파도가 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어슴푸레 산발한 수학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제일 무섭다고 알려진 분이었다. 나는 밤새 웅크리고 앉아 고민을 하다가 날이 새자마자 그 수학선생님에게 달려가 냉큼이실 직고를 했다. 선생님은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설마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라고 했다. 죄송하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 아이와 헤어졌다. 안개가 자욱하던 날이었는데 내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래를 위해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아이는 자신은 이 세상에서 그다지 성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민들레처럼 살고 싶다'라고 했다. 나는 왜냐고 물었다. 1남 6녀의 둘째 딸로 나름 고민하면서 세상에 대해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Boys (Girls) be ambitious'라는 문구 정도는 알고 있었고 빈말이라도 성공하겠노라고, 잘 살고 싶다고 하는 판에 민들레라니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를 진짜로 마음에서 밀어버리기로 했다. 만남이 한 달이나 되었을까? 아니 몇 달? 아주 짧았다.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이 솔솔 피어나기도 전에 싹둑 잘린 것 같기 때문이다. 수학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셨고 나는 그때 이후로 더 공부를 되찾아야만 했다.
나에게 성공은 잘 사는 것이었고 공부를 잘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들어왔기에 공부만 하면 되는지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강원도 두메산골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가정의 기둥이 되어 우리 가족을 보란 듯이 궁핍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의 몸부림은 나방의 날갯짓만큼도 주목을 못 받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은 나라 임금도 구제를 못한다고 했던 말이 맞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야망을 품은 것조차 가물가물해지던 20대 후반까지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했고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백마를 타고 등장해 공주처럼 살게 해 줄 낭군을 현실속에서는 만날 수 없다. 지극히 빨리 그 아이는 철학자처럼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성서의 '솔로몬의 영광이 들꽃하나만도 못하다' 는 구절도 알고 있었을까?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다.
'분홍 셔츠'와 '민들레' 여름 이야기가 있는 오늘이 풍성하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잠시 민들레의 허리춤을 잡았던 떨리는 순간, 그리고 이른 아침 학교 건물 뒤에서 그 아이를 훔쳐보던 나의 순수함이 그리워진다. 이제는 떨리는 것도 없고 웬만해서는 눈물도 잘 나지 않는 것 같다.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민들레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뜨겁던 여름 날씨처럼 후덥지근하게 살던 우리 부부는 이제 자연 속에서 꽃 사진 찍고 나무 이름을 외우는 자연주의자로 살아가려 하고 있다. 요즘은 앱이 있어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바로 알 수 있다. 오늘은 해당화, 쇠뜨기를 보았다. 가장 흔하다고 무시당하기 일쑤인 노란 민들레는 많은 꽃씨를 멀리까지 바람에 실어 보낸다. 앉은 자리에서 그처럼 많은 씨앗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꽃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게 강인하고 씩씩하게 사는 민들레 같은 인생, 소박하고 진실한 스토리를 남기는 인생이고 싶다. 노오란 민들레 꽃동산 위에 온갖 나비들이 춤추며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젠 내가 '민들레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