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농장에서 파는 여린 열무를 사 왔다. 식구가 별로 없어 김치를 많이 먹지 않아 줄곧 사서 먹었는데 남편이 시어머님의 음식이 그리운지 며칠 전부터 열무김치 타령을 했다. 양이 많아서 씻고 절이고 양념까지 하는데 오랜 시간이 들었다. 시원하게 열무김치 냉면을 먹다 보니 어릴 적 음식이 생각났다.
나는 강원도에서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처음 시골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 교무실 차창 밖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유별나게 기억에 남아있다. 마실 물을 갈아먹어서인지 나는 머리털에 헌데가 자주나 머리카락을 남자아이처럼 깎고 다녀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어렸던 시절, 마치 어디선가 굴러 들어간 돌처럼 시골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리는 외가댁이 빌려 준 산기슭 개간한 땅에 여러 곡식을 심어 먹고살았다. 아버지는 서울 태생이라 농사일에 서툴렀다. 나무 지게를 진 모습마저 어린 내 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웠는데 아버지는 비틀비틀하면서 산에서 내려오곤 했다.
또 밭을 갈라치면 쟁기를 끌던 ‘소’조차 아빠 말을 안 듣고 되레 아빠를 위협하곤 했다. 밭 갈다가 딴짓하며 풀을 뜯어먹던 그 망나니 같은 ‘소’를 아버지는 “훠어이 훠어이”하며 서럽게 부렸다. 똑같이 일을 해도 동네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수확량이 적었다. 그러니 1남 6녀나 되는 자녀를 돌보아야 했던 엄마는 항상 배가 곯았다.
겨울이면 동네 집들마다 고구마 깡이 사랑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땅을 파서 무를 파묻어 놓고 겨우내 먹고는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밥이 제일이었다. 청국장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어느 겨울날이면 엄마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안고 저녁밥 시간이 지나면 스르륵 사라지곤 하셨다.김치죽으로 자식들 허기를 때웠지만 엄마를 배부르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타지에 나갔던 셋째 딸이 이 사업 저 사업 돈 안 되는 사업만 하다가 결국에 망해 먹고는 다시 시골로 돌아온 처지였다. 처가살이하겠다고 갑자기 찾아 들어온 사위와 딸, 1남 6녀의 처지가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싶다. 외할머니가 청국장을 화로에 바글바글 끓여서 엄마에게 하얀 밥과 함께 먹이려던 그 겨울밤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엄마의 뒤를 밟았다. 내 뒤로는 동생들이 뒤따랐다.
결국은 엄마의 하얀 쌀밥은 우리들의 푹 꺼진 뱃속으로 한 숟가락씩 들어가고 우리는 외숙모의 "너희들 때문에 엄마가 고생한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뺏어 먹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그때에 알았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청국장을 끓인다. 화롯불에서 보글보글 끓던 청국장에는 들어 있는 것이 설컹 설컹한 무밖에 없었는데 그 맛을 잊지를 못한다. 눈칫밥은 허기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더 맛있었다.
외할머니는 가끔씩 고구마를 치마폭에 숨겨와 던져 주고는 부리나케 가셨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가깝게 살았었는데도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래 머무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너무 밟히는 것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눈앞에 올망졸망하던 우리들을 놓고 외할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시고 아프셨을까? 10남매를 낳고 사셨던 외할머니는 말년에 치매에 걸리셨지만 90세를 훨씬 넘겨 사시며 자식들의 원성도 많이 들으셨다. 자식과 며느리, 손자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도 살아야 하셨다.
그런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어도 나는 가보지도 못할 뿐 아니라 부고 소식도 제대로 못 들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는지 멀리 사는 내게는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가 치러졌다. 그래서 외손녀를 귀여워하느니 차라리 방아깨비를 귀여워하라는 말이 있는가 보다. 우리 때문에 치매에까지 이르신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갔고 어쩔 수 없는 자책만 남아 있다.
“사랑하는 나의 외할머니, 당신의 치마폭에 숨겨져 있던 고구마 때문이었군요, 내가 아직도 이역만리 떨어진 밴쿠버에서 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목에 걸려요. 할머니가 가져다주시던 고구마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요? 할머니! 할머니!”
나는 유난히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못 하는 편인데 그래도 생각이 나는 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가던 기억이다. 우리 집 모내기를 하거나 밭을 매는 날에는 나도 엄마랑 함께 국수를 삶아 채반에 담고 긴 둑 방 길을 걸었다. 막걸리 주전자까지 들고 풀을 발로 툭툭 헤치며 갔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나는 둑 방 길을 좋아한다. 그때 고사리처럼 쑥쑥 올라오는 야들야들한 '밀'이란 싹을 꺾어서 고추장에 푹푹 찍어 먹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뽕나무에 얽힌 추억을 기억해보니 새롭다. 내가 자라던 곳은 누에를 길러 고치를 팔아먹고 살았다. 누에들이 내가 뽕나무 잎을 들고 가까이 갈라치면 대가리를 휘저으며 뽕잎을 찾던 생각이 난다. 누에들이 사각사각하면서 뽕나무를 먹어 치우기 시작하면 그 소리가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에들이 하얀 고치 안으로 다 들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신기했다. 뽕나무에는 ‘오디’가 새까맣게 익어가곤 했다. 우리들에게 '오디'는 '비타민C'였다
밴쿠버에는 블랙베리 (복분자 나무)가 무척 많다. 이 열매는 나의 ‘오디'를 기억나게 한다. 오디는 아주 달콤한 즙이 나오는 보들보들한 촉감을 느낄 수 있고 블랙베리는 새콤하면서 거죽이 약간 거칠거칠하다. 하지만 여러 해 전에 농장에서 딴 것은 아주 알이 크고 달콤해서 ‘오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것도 어릴 적 추억 때문인지 해마다 8월이면 이곳 밴쿠버에 한창인 블랙베리를 따러 다니고 했다. 사실 이곳 사람들은 자연에서 무엇이든지 채집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지만 딸기를 따는 것은 괜찮다고 하니 잼을 만들거나 술을 만들어 먹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나도 오래전 몇 통을 따서 설탕에 재워 넣어 효소처럼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스로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이 눈 주위가 벌게지고 혀가 꼬이는 것 같아 보니 '아뿔싸' 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블랙베리를 따다 보면 어느새 가시 넝쿨의 가운데 들어가 있기도 했다. 열매에 끌려 어떻게 나올지는 생각도 못 한 채 말이다. 나도 모르게 어릴 적 습관이 저절로 나오는 나는 아직도 강원도 여자다.
‘지르너미’에서 동네 어른들은 자주 다래나 머루를 따러 깊은 산중으로 향하곤 했다. 십 년이 지나도 그곳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던 아버지도 외삼촌을 따라 머루나 다래를 따 왔는데 늘 양이 부족했다. 고단하게 쓰러져 주무시던 아빠 몰래 먹던 다래는 약간 달콤하면서도 무른 맛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버지의 흔적처럼 어디서도 다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카투사 출신이셨던 아빠는 밀가루 빵을 좋아해서 엄마는 농사일에 힘든 와중에 아빠의 입맛을 맞추느라 더 분주했다. 이스트를 넣은 반죽을 양은 쟁반에 넓게 펴서 쪄내면 둥글게 부풀어 올라 푹신푹신했다. 그 당시에 그 비싸다는 라면은 또 어떻게 구하셨던 것일까? 엄마 말에 따르면 미국에 있던 큰 아버지가 약간의 달러라도 보내주면 우리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라면을 먹기도 했다. 그 라면을 먹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우리 집 마당에 모여들었다. 어지간히 눈치를 주어도 ‘철우’라는 아이는 죽어도 집에 가지 않고 한 젓가락이라도 먹여주어야 갔다. 그래서 그 철우를 미워했었다.
몇십 리 떨어져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음식은 찰 옥시기였다. 사카린을 약간 넣고 물에 쪄낸 찰옥시기는 알갱이가 툭툭 터져서 그것을 먹으려면 입이 다 엉망이 되곤 했었다. 그 시절 나랑 가장 친했던 친구 춘자는 엄마가 쪄준 옥시기를 나에게 주곤 했는데 그 집은 평창에서 가져온 옥시기라 정말 어느 집의 옥수수보다 맛있었다. 장자울 고개 아래 있던 춘자네 집 옥시기를 먹었기에 계곡을 타고 내려가 공동묘지를 지나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논마지기 둑길을 걸으며 넓은 들을 지나야 하던 통학 길이 견딜만했던 것 같다.
눈이 천지에 하얗게 쌓여 길인지 아닌지 몰라 헷갈릴 때 노루가 나를 내려다보던 너머로 보이던 오직 단 하나 숲 속의 집. 그래서 항상 위로가 되어주던 이정표 같던 춘자네 집, 춘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평창 옥시기를 쪄 먹고 있을까?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나를 기억해줄까?
또 음식이라면 내 친구 은미네 집의 음식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담배 농사와 고추 밭매기가 끔찍하게 싫던 내가 유일하게 즐길 수 있었던 일탈의 시간은 바로 은미네 집에 가서 슬립오버를 하는 날이었다. 그때 이미 라디오로 늦은 별 밤의 고독을 즐기는 법을 알았던 은미네에서 먹던 고추 절임은 정말 꿀맛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잘 삭은 고추 절임을 보면 덜컥 사는데 그때 그 맛을 만난 적은 없다.
둘이서 밤새 머리를 맞대고 낄낄거렸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재미있던 비밀스러운 우리 소녀들만의 시간이었다. 그때 우물가에서 둘이 벌거벗고 멱을 감다가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 다니던 생각을 하면 부끄러워진다. 가끔 내 딸이 친구들과 시시덕 거리면 나는 가슴이 뛴다. 그때 생각이 나서 마음껏 놀라고 마음으로 응원해 주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 꿈결 같은 시간으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엄마가 만들어준 가지나물처럼 고추를 잘잘하게 썰어서 매콤하게 무치고,
콩나물국은 소금만 넣고 밍밍하게,
만두는 라면도 부셔 넣어서 그때처럼 사치스럽게,
하얀 찐빵을 보면 쟁반에서 부풀어 오르던 찐빵 생각에 꿀꺽 침이 넘어가고,
고구마는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 생각에 목에 걸리고,
잔치국수를 보면 새참 때 찰랑찰랑 국물을 흘리던 생각이 나서 후루룩 국물을 들이켜게 되고,
막걸리만 보면 십 오리 길을 걸으며 심부름하던 생각이 나서 마음이 먹먹해지고,
하얀 쌀밥만 보면 외할머니네 집에서 엄마 밥그릇을 뺏던 생각이 나서 송구스럽다.
담뱃잎 농사와 밭농사, 논농사, 탈출하고 싶었던 그 시간들 때문인지 나는 밥그릇의 밥 한 톨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외할머니께 ‘보고 싶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 그리고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지어 드릴 수 있다면, 지금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다고, 건강 때문에 하얀 밥을 먹지 않고 잡곡밥을 먹는다고 이야기해 드릴 수 있다면 ….’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가 가엾다.
이제 어머니께서 외할머니의 연세가 되어 방에 머무신다. 어머니가 외할머니처럼 기억을 잃으시기 전에 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야겠다. 외손녀를 귀여워하느니 방아깨비를 귀여워하라고 했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