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는 '여우를 자주 시집'보내는 도시다. 소나기의 뜻은 비가 심하게 내린다는 뜻인데 예전에는 이런 날을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고도 했다. 변덕쟁이 여우가 시집을 가는 날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봄여름에 소나기가 주로 내린다면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우기가 거의 5-6개월 지속되기 때문에 밴쿠버를 레인쿠버라고도 부른다. 처음 밴쿠버로 왔던 21년 전에는 겨울비라 해도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였는데 요즘엔 빗발이 훨씬 더 세진 것 같다. 북극곰이 겪고 있는 환경오염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밴쿠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각기 상이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해가 늦게 져 밤 9시 넘어도 환한 여름철에 방문한 사람들은 1000당에서 1당을 뺀 999당이라며 이곳을 좋아한다. 하지만 오후 4시만 되면 어두워지며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우기에 방문하는 사람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밴쿠버 주민들은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계절성 우울증을 앓은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여름이 되기가 무섭게 태양을 즐긴다. 자동차 문을 시원하게 떼어 놓고 다니거나 열어젖힌 오픈 카도 많고, 웃통을 벗고 다니는 몸짱 쪽, 그 외에도 주말이 되기가 무섭게 집을 두고 떠나는 레저스포츠 마니아들이 있다.
밴쿠버는 잔디로 감싸서 그런지 맨땅 보기가 힘들다. 먼지가 뽀얗게 이는 흙길을 밟으려면 산으로 들로 나가면 된다. 산으로 가면 더 소나기가 빈번하게 온다. 구름 이불이 어느새 파란 하늘을 뒤덮으며 빗발이 친다. 비가 갠 후 숲에서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흰 안개의 모습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작년에 수천 킬로 떨어진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불 연기가 밴쿠버 하늘까지 점령했었다. 밴쿠버의 북쪽 차가운 공기 때문에 연기가 올라가지 못해 병목현상이 생긴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지의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지구는 하나라는 것'을 극심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럴 때 간절하게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생에서의 소나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 아무 준비도 없이 들이닥치는 비극적인 일들을 겪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생생하게 체험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알지 않아도 될 정보들에 과다하게 노출된다. 그러므로 과도한 긴장상태에 있게 되므로 불안 증세는 깊어지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도망가거나 싸울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과도해지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의 불면 증세 외, 각종 정신질환을 겪게 되는 것이다.
밴쿠버처럼 바다가 가깝고 불시에 소나기가 자주 내리는 지역의 일기예보는 맞지 않는 날도 많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100퍼센트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다. 소나기는 언제나 내릴 수 있다. 소나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하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다. 뭔가를 예측하고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 그럴 경우에 더 불안해진다. 삶의 환경을 컨트롤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순응하며 겸손하게 수용하는 태도가 차라리 불안을 더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진 대처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어릴 적의 어떤 경험을 통해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느꼈던 적이 있다 해도 그때와는 다르게 성장해 있는 자신의 경제적, 신체적, 감정적인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도 오랫동안 걱정과 근심을 달고 살았다. 그것은 그래야만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걱정 근심하다가 몸의 면역체계가 약해져서 빨리 늙는 것 같았다.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누구나 암등 질병에 걸린다. 누구에게나 올 그런 시간을 걱정하는 것은 어쩌면 그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신 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막연히 나와 내 가족 등 이 겪을 미래의 일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그보다는 더 의미 있고 재미있으며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살다가 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걱정 근심을 대체했다고 믿는 편이 좋겠다. 글쓰기를 통해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활동으로 채워나간다. 요즘에는 시니어들의 노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며 돕고 싶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은 연세가 있으신 분과 산책하면서 미처 몰랐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숲에서 우리가 막 나오려 할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잎이 울창한 나무들 아래에서 맞는 비는 상쾌하기까지 했다. 내리는 비에 오동통한 고사리가 자라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했다. 나뭇잎에 떨어진 비가 내는 후드득 소리,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냇물의 소리와 더불어 싱그러운 풀냄새를 코를 벌렁거리며 폐 속 깊이 빨아들였다. 옷이 흠뻑 젖는다 해도 하얀 운동화에 흙탕물이 튄다고 해도 그다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자연도 인생처럼 그들만의 생명주기에 맞는 적절하거나 심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한다.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하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혼자 하는 산책보다 나보다 한참 어른이신 시니어와 함께 하는 산책에서 알 수 없었던 인생의 지혜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특별한 시간임이 틀림이 없다.
인생에서 맞닥트리게 되는 여러 가지의 상황들, 특히 급작스러운 상황을 소나기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같은 하늘 아래 소나기가 내리면 해가 뜨는 저 쪽 하늘에서는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찬란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도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서야 가능하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가 미래에 무지개를 만날 수도 있게 해 준다.
밴쿠버는 소나기가 잦아서인지 드넓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무지개가 자주 뜨곤 한다. 그런 날은 캐나다를 동서로 가로지른 No.1 하이웨이를 달리며 무지개를 만나러 떠나고 싶다. 열린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무지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