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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사이다 Sep 17. 2020

다시, 토끼처럼

“우리는 못한다!”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2012년 나는 첫째 아이를 낳았다. 결혼하고도 한동안 임신이 되지 않아 고생하던 중 태어난 아이라 더 기뻤지만, 그 기쁨이 그리 오래지 못했다. 제주도에 계시는 친정 부모님은 당연히 아이를 봐주실 수 없었지만, 서울에 계시는 시부모님이 육아를 도와주시리라 기대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그럼, 애는 어떻게 해요”

  “너희들 아인데 너희가 키워야지, 우리도 이제는 힘들어서 못해!”

  첫째를 낳기 전 제대로 의논해 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시부모님이 키워주실 줄 알았다. 먼저 결혼한 서방님의 첫째 아이 육아를 시부모님께서 온전히 도맡아 하시던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은 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 몸조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태국으로 떠나셨다. 그곳에서 작은 펜션을 계약하셨고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셨다. 말로만 듣던 독박 육아가 시작됐다.      


  나는 결국 출산휴가 3개월이 지나고 회사를 그만뒀다. 어떻게든 일과 육아를 병행해보려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핏덩이 같은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는 없었다. 그저 이것이 엄마가 되는 과정이겠거니 했다.

  “엄마, 애가 밤에 잠을 안 자. 왜 밤마다 우는지 모르겠어.”

  “제주도에 있으면 내가 봐줄 텐데, 애만이라도 좀 보내, 엄마가 봐줄게!”

  왜 우리 집 애만 이렇게 예민한 건지, 등에 센서가 달린 듯 바닥에만 눕히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가 두 돌이 다 될 때까지 2시간 이상 이어 자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해외출장이 잦은 남편도, 아이를 못 봐주신다는 시부모님도, 괜히 제주도에 있는 부모님까지도 원망하게 되었다.

     

  첫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생겼다. 또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둘째를 낳는 순간 바로 알았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것이 뭐가 힘들다는 건지. 둘은 차원이 달랐다. 몸은 하나인데 둘이 다 엄마를 원했다. 자는 시간도, 먹는 것도 다른 둘을 온전히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은 같이 했는데 왜 나만 고생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이 어떤 일인지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나는 또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출산과 육아의 길로 들어 선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루는 친구 딸 돌잔치가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난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돌잔치에 갔다. 그 자리에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머리까지 듬성듬성 빠지고, 왜 이렇게 안 돼 보이냐!”

  나는 순간 멍해졌다. 그동안 나는 달라진 내 모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들 눈에는 한눈에 달라진 내가 보였나 보다. 

  “그것 봐, 나만 이래. 애 보느라고 집에만 있으니......”

  괜한 푸념을 남편에게 해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육아의 길이다. 결혼 안 한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애 낳고 몇 년간 영화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나는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엄마라는 명칭에 맞게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나를 짓누르는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엄마 자격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나만 보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다시 힘을 냈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육아에 집중했고, 어느덧 예민하던 시기를 지내고 첫째는 9살, 둘째는 7살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엄마만 찾지도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잘 놀며 지낸다. 나는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을 가장 잘 알게 되었고, 남들은 알 수 없는 단단한 애착으로 전우애 같은 것도 생겼다. 사회에서 뒤처졌다고 생각하던 9년이 아이들을 독점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무도 없는 추운 겨울에 놀이터에서 뛰놀던 일들, 동네 뒷산을 산책하며 나뭇잎을 모으고 나이테를 관찰하던 일들, 길 잃은 고양이들 밥 챙겨주었던 일들, 철봉 매달리기 기술을 위해 날마다 철봉에 달려있던 날들, 매일 동네 도서관에 들러 같이 책 보고 초콜릿 우유 사 먹던 시간들, 아빠 없이 셋이서 가서 고생만 하고 돌아온 기차여행까지. 추억으로 아이들과 내 기억에 남아있다. 7살 둘째가 가끔 예전에 이런 적이 있었잖아 하고 지난 이야기를 떠올려 이야기할 때면 작은 사건 하나도 세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나갔다. 아이들은 뛰놀고 나는 벤치에 않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으로 작은 RC카 한 대가 섰다. 둘째 아이 거다. 둘째 아이가 RC카를 조정해 엄마 앞으로 보낸 거다. RC카에는 예쁜 들꽃이 태워져 있었다.

  “엄마, 선물이야! 꽃이 너무 예뻐서”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나는 덜컥 눈물이 맺혔다. 예쁜 들꽃을 보고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 그것 하나면 9년 동안 잘해 왔구나 싶었다.

     

  뒤돌아보면 뒤처지고 갇혀있었다고 생각하던 9년의 시간이 오히려 나를 성숙시켰고, 우리 가족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는 잘난 척하면서 낮잠 자다 늦어버린 토끼보다 꾸준히 자기 갈 길을 가는 거북이가 이긴다. 나는 아이들을 낳기 전엔 토끼처럼 바쁘게 뛰어다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9년의 느린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했던 토끼가 인생을 더 깊이 배울 수 있지는 않았을까. 이제 남은 인생 다시 토끼처럼 뛰어가는 일만 남았다. 이제는 예전처럼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주변 풍경도 보면서 뛰기에 성실한 거북이에게는 지더라도 나쁘지 않은 경기가 될 것 같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니까.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기 페이스에 맞춰 달리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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